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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치솟는 유럽 전기값...'넷제로'의 함정

  • 기자명 김신회 기자
  • 승인 2021.09.2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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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탄소 추진 에너지 수급난 우려...화석연료 수요, 투자 균형도 살펴야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유럽에서 최근 전기 가격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고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이달 들어서만 도매 전기값이 각각 36%, 48% 올랐다. 영국 전기 가격도 몇 주 새 2배 넘게 뛰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럽 전기값이 치솟은 이유로 천연가스 공급난을 첫손에 꼽았다. 유럽이 쓰는 전기의 5분의 1이 천연가스 발전으로 생산되는데, 천연가스 공급난이 천연가스 가격을, 궁극적으로 전기값을 띄어 올렸다는 것이다. 유럽 내 천연가스 가격은 올 들어 3배 가까이 상승, 최근 사상 최고치를 새로 썼다.

유럽은 천연가스의 3분의 1을 러시아에서, 또 다른 5분의 1은 노르웨이에서 각각 들여온다. 시베리아 천연가스 공장 화재 등으로 공급량이 예상했던 것보다 줄었다고 한다. 액화천연가스(LNG)로 부족분을 메우려 하지만, 중국과 일본 등의 LNG 수요가 급증하면서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대표적인 친환경 재생에너지원인 풍력발전의 부진도 전기값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풍력 발전은 유럽 전력원의 10분의 1을 차지하지만, 최근 바람이 이례적으로 잠잠해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한다. 

유럽 내 전기 가격은 연료 수요가 크게 느는 겨울까지 계속 고공행진할 전망이다. 올 겨울 강추위가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를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프랑스·독일·영국 도매 전기 가격 추이(메가와트시당 유로, 파운드)/자료=ICIS
프랑스·독일·영국 도매 전기 가격 추이(메가와트시당 유로, 파운드)/자료=ICIS

◇'2050 넷제로' 에너지 수급난 우려

탈탄소 정책에서 가장 앞서고 있는 유럽이 화석연료인 천연가스, 재생에너지인 풍력 공급난으로 고전하고 있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안 그래도 화석연료 가운데 온실가스 배출량이 적은 천연가스는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 사이에서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기상 변화로 풍력 발전 출력이 떨어지면 천연가스 발전소 가동을 늘려야 한다. 천연가스 가격이 뛴다고 석탄 발전으로 회귀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세계 각국이 추진하는 탈탄소 정책이 자칫 에너지 수급 단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주요국이 2050년까지 온실가스인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0)로 줄이는 '넷제로'(탄소중립) 실현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석유와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감산분을 친환경 대체 에너지로 모두 메우는 건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글로벌 석유 대기업들은 이미 유전과 가스전에 대한 투자를 줄이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을 묻는 주주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탈탄소 경영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가 됐다.

노르웨이 에너지 정보 서비스업체인 라이스타드에너지에 따르면 구미 석유 대기업 6곳은 2015년 총 1200억달러였던 석유·천연가스 탐사·개발 투자액을 올해 568억달러로 줄일 전망이다. 그만큼 생산이 줄 수밖에 없는데, 탈탄소 기술 개발과 보급이 더디면 에너지 수급난이 불가피하다.  

에너지별 공급량 추이와 전망. *단위는 엑사줄(EJ). 1EJ는 석유 1억7000만배럴의 에너지량./자료=국제에너지기구
에너지별 공급량 추이와 전망. *단위는 엑사줄(EJ). 1EJ는 석유 1억7000만배럴의 에너지량./자료=국제에너지기구

◇화석에너지 수요 오히려 늘어날 것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5월에 낸 '2050 넷제로 로드맵'에서 오는 전 세계가 사용하는 에너지 가운데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2020년 80%에서 2050년이면 20%로 줄 것으로 예상했다. 전 세계 석유 수요가 2050년에 2020년 대비 76%, 천연가스 56%, 석탄은 89%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예상이라면 화석연료 투자 축소가 크게 문제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IEA의 예상이 '넷제로' 실현을 위한 이론값일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일본에너지경제연구소가 제시한 2개의 시나리오를 통해 이론과 현실의 격차가 크다고 지적했다. 

기존 추세를 반영한 기준 시나리오에 따르면 오는 2050년 선진국에 필요한 화석에너지는 지금보다 11% 줄지만, 신흥국에서는 오히려 50% 이상 늘어난다. 종합하면, 2050년의 전 세계 석유, 천연가스 수요가 각각 2020년 대비 36%, 57%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연구소는 탈탄소 기술 개발을 전제로 한 또 다른 시나리오에서도 2050년에 석유와 천연가스 수요가 각각 8%, 16% 늘어날 것으로 봤다. 친환경 재생에너지가 화석연료 수요를 상당부분 흡수해도 신흥국 자동차의 석유, 산업설비의 천연가스 수요가 꾸준할 것으로 연구소는 예상했다.

신흥국이 많은 아시아지역에서는 최근에도 탄광 개발이 줄고 있는 가운데 석탄 수요가 여전히 크기 때문에 석탄 가격 상승세가 돋보인다.

◇석유 증산 추진 사우디 "대단한 기회"

지난 수십년간 석유 패권을 잡아온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미 에너지 수급 단절 가능성을 내다보다 움직이고 있다. 이 나라 국영 석유 회사인 사우디아람코의 아민 나세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석유 공급 부문에 저투자가 상당한데, 이는 대단한 기회"라며 "우리는 열심히 생산능력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사우디아람코가 글로벌 경쟁사들과 반대로 생산능력을 확대할 태세라며, 경쟁사들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재생에너지 투자를 늘리라는 정부와 주주들의 압력 아래 감산을 예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지역 산유국들이 화석연료 투자를 늘려 시장 지배력을 높이면 세계 정치·경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970년대 석유파동 같은 위기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상이변이 홍수와 가뭄, 산불 등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일으키고 있는 만큼 넷제로는 불가피한 과제다. 전문가들은 다만 넷제로와 맞물린 에너지 수급 위험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탈탄소를 위한 기술 개발을 서두르는 동시에 화석연료 같은 기존 자원의 공급 부족을 막을 수 있도록 투자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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