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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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리먼사태가 터지는 게 아니냐."

중국 부동산 공룡 에버그란데(헝다)그룹의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미국 월가가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월가의 투자 큰손들이 중국 회사채에 상당한 자금을 넣어 놓은 터라 이번 사태가 연쇄 파장을 일으켜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일각에서는 에버그란데의 파산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본격화한 리먼사태와 같은 후폭풍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시기가 절묘해 불안감을 더 자극한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한 게 2008년 9월 15일, 13년 전 이번주다. 당시 미국 4위 투자은행이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보호 신청을 하자 공포에 휩싸인 투자자들은 일제히 주식을 비롯한 위험자산을 내던졌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최대 뇌관이 터진 셈이다. 뉴욕증시 간판지수인 S&P500은 이듬해 3월 바닥을 치기까지 전 고점 대비 60%가량 폭락했다.

◇승승장구하던 에버그란데...어쩌다가

1996년 광저우에서 설립된 에버그란데는 매출 기준 중국 2위 부동산개발회사다. 중국의 초고속 성장과 맞물린 부동산 투기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다. 주로 중상류층을 위한 아파트를 주력으로 삼아 성장 토대를 마련했다. 중국 전역에서 완공한 주거·상업·기반시설 프로젝트만 1300건에 달한다. 

최근까지 한창 때의 리먼브라더스만큼이나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선전에 본사를 두고 있는 에버그란데는 직원이 20만명에 이르고, 지난해에는 1100억달러(약 129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식품, 보험, 생수, 심지어 전기차, 축구팀(광저우FC)에 이르기까지 부동산과 무관한 분야로 사업 반경을 확대했다.

에버그란데의 위기가 처음 알려진 건 지난해 9월 유출된 문건을 통해서다. 에버그란데가 중국 정부에 자금난에 직면할 수 있다며 우회상장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우회상장 계획은 끝내 무산됐다.

지난 6월 에버그란데가 일부 채무를 상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려가 다시 불거졌다. 7월에는 중국 법원이 에버그란데의 일부 예금을 동결했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에버그란데는 지난달 말 중간 실적을 발표하며, 자금 조달에 실패하면 디폴트가 불가피하다고 경고했다. 지난 14일에는 디폴트 위험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자료=인베스팅닷컴
자료=인베스팅닷컴

에버그란데는 자금 마련을 위해 주요 자산 매각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최근에는 아파트 가격을 25% 인하하기도 했지만, 이미 중단된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가 약 800건, 무려 120만명이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고수익을 장담하며 판 자산관리상품(WMP) 상환에도 차질을 빚으면서 고객들의 고발과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선분양을 통해 투자금을 마련해온 에버그란데의 사업방식이 폰지사기와 다를 바 없다고 꼬집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09년 홍콩증시에 상장된 에버그란데의 주가는 지난해 9월 이후 85% 폭락했다. 창업자인 쉬자인 회장은 지난해 3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꼽은 중국 3위 부자로 등극했지만, 같은 해 12월에는 순위가 10위로 추락했다.

에버그란데의 부채는 3050억달러(약 360조원)에 이른다. 중국 국내총생산(GDP)의 2%에 해당하는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특히 내년에 만기를 맞는 외채만 74억달러에 이른다. 

◇리먼사태 데자뷔...中경제 역풍 우려

월가에서 에버그란데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건 이 회사의 파산이 불러올 연쇄 파장을 우려해서다. 채무조정 과정에서 투자자들이 감수해야 할 손실(헤어컷)이 75%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투자자들의 손실도 문제지만, 부동산을 주요 성장엔진으로 삼고 있는 중국 경제의 취약성을 둘러싼 우려도 크다.

에드 야데니 야데니리서치 사장은 16일에 낸 투자노트에서 "에버그란데의 붕괴가 리먼브라더스의 종말이 미국 증시에 미친 영향과 맞먹는 시스템 리스크(systemic risk)를 갖고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에버그란데의 파산이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경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얘기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에 따르면 에버그란데는 중국에서 달러로 가장 많은 하이일드본드를 발행하는 기업이다. 하이일드본드는 투자부적격 등급 채권(정크본드)을 뜻한다. 투자위험이 높은 만큼 수익률이 높다(high-yield). 중국 기업들이 발행한 달러 표시 하이일드본드 가운데 에버그란데가 차지하는 비중이 16%에 이른다고 한다.

BofA는 에버그란데가 무너지면 중국의 달러 정크본드 디폴트율이 3%에서 14%로 치솟을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달러 정크본드시장의 투자위험이 그만큼 커지는 셈이다. 디폴트율이 높아지면 기업들은 달러 자금을 조달하기 어렵게 된다.

일련의 위험신호에 중국 정크본드 수익률(금리)은 이미 지난 2월 7.1%에서 최근 14%로 올랐다. 수요가 그만큼 줄었다는 뜻이다. 중국 기업들이 정크본드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데 드는 비용 부담이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블룸버그는 에버그란데가 무너지면 위험회피 성향이 강해진 은행들이 회사채 보유 비중을 축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 금융시스템의 주요 자금원인 단기자금시장(머니마켓)의 동결 가능성도 제기했다.

중국 정부와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부동산 대출에 관여한 은행권을 압박할 공산도 크다. 은행들이 대출 문턱을 높이기 쉽다.  

에버그란데가 중국 허난성 뤄양에서 짓다가 건설을 중단한 아파트 '에버그란데 오아시스'/사진=로이터연합뉴스
에버그란데가 중국 허난성 뤄양에서 짓다가 건설을 중단한 아파트 '에버그란데 오아시스'. 자료는 주요 외신 보도 종합./사진=로이터연합뉴스

문제는 중국 경제 성장세가 안 그래도 둔화하고 있는 시점에 부동산시장이 더 얼어붙으면 경기냉각이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설적인 헤지펀드 매니저인 조지 소로스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쓴 글에서 에버그란데의 파산이 중국 경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부동산시장은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중국 정부의 강력한 통제로 이미 큰 타격을 받았다. 한 예로 지난달 중국의 주택 거래액은 전년동기대비 20% 줄었다. 팬데믹 사태가 터진 이후 감소폭이 가장 컸다. 

맥쿼리그룹은 최신 보고서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다함께 잘 살자는 '공동부유'를 주창한 만큼 연내에 부동산시장에 대한 완화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부문이 내년에 중국 경제의 주요 성장역풍으로 작용할 것으로 봤다.

로건 라이트 로디움그룹 애널리스트는 블룸버그에 중국 부동산시장의 조정은 건설 관련 수요 감소로 이어져 중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역풍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美금융시장 '정중동'...中정부 구제 나설까?

CNN비즈니스는 그럼에도 월가에서는 아직 큰 동요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들이 당장은 중국 정부가 나서 피해를 최소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CNN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에버그란데 사태가 미국 금융시장으로 전이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마크 잔디 무디스어낼러틱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에버그란데의 붕괴, 더 나아가 중국 부동산기업들의 자금 문제가 미국 경제나 금융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디폴트 사태가 금융위기로 번질 수는 있지만, 중국 당국이라면 이런 사태를 미리 막을 게 거의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사이먼 맥아담 캐피털이코노믹스 선임 글로벌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의 '리먼 모먼트'(Lehman moment) 이야기는 틀렸다"고 단언했다. 그는 에버그란데의 혼란스러운 붕괴조차 세계적인 영향은 시장의 일부 격변에 그칠 것으로 봤다.

데이비드 코톡 컴벌랜드어드바이저스 공동 설립자는 아예 에버그란데 사태를 "중국 내 신용 문제"라고 평가절하했다.

CNN은 미국 국채와 회사채의 금리 차이(스프레드)가 매우 낮게 유지되고 있다며, 이는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짚었다. 투자자들이 위험을 인식하게 되면 최고 안전자산 가운데 하나인 미국 국채에 수요가 몰려 금리가 떨어지고, 회사채 금리는 올라 스프레드가 벌어지는 게 보통이다.

반면 야데니는 중국 정부가 에버그란데를 살리는 대신 시장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해 피해를 최소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에버그란데가 발행한 회사채 가치가 지난 1주일 새 이미 액면가 1달러당 50센트로 상각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국 정부가 국내외 회사채 투자자들을 더 이상 구제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며, 에버그란데가 파산하면 국내외 채권자들은 후순위로 밀려날 것으로 예상했다. 에버그란데가 자산을 매각해도 투자자들이 챙길 수 있는 게 사실상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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