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중앙은행들이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나설 태세다. 기후변화가 금융시스템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최근 행보가 부쩍 분주해졌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기후변화 리스크(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최근 2개의 위원회를 신설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내년에 주요 은행들을 상대로 실시할 재무건전성 평가(스트레스테스트)에서 기후변화 영향을 눈여겨 볼 계획이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BOE)은 물가안정이라는 기본 책무 외에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주요 중앙은행 가운데 기후변화를 공식적인 정책책무로 삼는 건 영란은행이 처음이다.
이런 가운데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두루 속한 녹색금융네트워크(NGFS)는 지난 24일 낸 보고서에서 중앙은행들이 지구온난화에 맞서 쓸 수 있는 선택지 9개를 제시했다. NGFS는 기후·환경 관련 금융리스크 관리를 위한 중앙은행·감독기구 협의체다.
NGFS가 웹사이트에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9개의 선택지에는 기후변화 위험으로부터 중앙은행 스스로를 보호하고 기존 통화정책 수단으로 정부의 친환경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이 담겼다.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의 사빈 마우데러 이사는 "전 세계 중앙은행에 기후변화 문제를 다룰 9개의 선택지를 제시한 건 유례없는 일"이라며 "진정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중앙은행들이 각국 사정에 따라 최선의 선택지를 고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산매입...친환경 자산 가중치 또는 고탄소 자산 배제
중앙은행들은 그동안 기후변화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방법론을 놓고 이견을 다퉜다. 특히 자산매입(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이 큰 분위기였다.
양적완화는 중앙은행이 채권 등 자산을 매입해 돈을 풀면서 장기금리 인하를 유도하는 경기부양책이다. 중앙은행들이 천문학적인 규모로 시행하고 있는 양적완화 프로그램으로 기후변화 위기에 제동을 걸려면,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 이들이 발행한 채권을 팔고 친환경 채권을 더 사들여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왔다.
ECB가 이런 주장을 했는데, 옌스 바이트만 분데스방크 총재는 '중앙은행의 중립성'을 이유로 반대했다.
보고서는 중앙은행들이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방법 2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기후변화 관련 위험이나 특정 기준에 따라 자산 매입 규모를 달리 하는 '틸팅전략'(tilting strategy)이다. 온실가스인 탄소배출량 등을 기준으로 삼아 친환경 기업이 발행한 채권의 매입 비중을 높이는 식이다. 매입 비중을 한 쪽으로 기울이는(tilting) 방식이다. 프랑수아 빌루아 드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가 최근 이를 제안했다.
다른 하나는 기후변화 관련 기준을 정해 놓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자산이나 채권 발행주체, 업종 등을 매입 대상에서 아예 배제하는 '네거티브 스크리닝'(negative screening)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연초에 도입한 방식이다.
보고서는 네거티브 스크리닝이 기후변화에 제동을 걸어 그 위험을 줄이기에 더 강도 높은 선택지가 될 것으로 봤다. 다만 통화정책 효과면에서는 틸팅전략이 나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방식이 네거티브 스크리닝보다 자산매입 여지를 덜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담보·대출도 '친환경' 우대...'애매모호' 기준이 문제
NGFS는 중앙은행들이 시중은행들로부터 받는 담보 관련 규정을 손볼 수 있는 선택지 4개도 제시했다.
탄소집약도가 높은 담보의 자산 가치를 깎는 '헤어컷'(haircut), 기후변화 리스크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담보를 아예 배제하는 '네거티브 스크리닝', 반대로 기준만 충족하면 담보의 지속성을 인정해주는 '포지티브(positive) 스크리닝' 등이다.
시중은행에 대한 신용지원과 관련해서는 3개의 선택지가 나왔다.
우선 기후변화 관련 유동성 지원 대출 기준을 특정하고 이를 충족하는 은행에 우대금리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방글라데시 중앙은행이 2009년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은 탄소집약도가 낮은 담보를 내놓는 은행에 역시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친환경 대출이나 기후변화 위험 공개 기준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조건부로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담보·대출 기준에 기후변화 리스크가 반영되면 탄소집약도가 높은 기업과 은행들은 유동성 압박을 받기 쉽다. 이에 따른 연쇄효과도 상당할 전망이다.
문제는 아직 새 기준을 정하는 데 쓸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고, 방법론을 둘러싼 문제도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마우데러 이사는 이런 이유로 통화정책이 남긴 탄소발자국의 크기를 측정하려고 나선 중앙은행이 실제로는 많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 예로 금융권이 중장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모기지) 채권, 국·공채 등 우량자산을 담보로 발행하는 커버드본드는 중앙은행들이 매입하거나 담보로 잡는 대상이다. 하지만 여기에 반영된 기후변화 위험 관련 데이터는 대개 확인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3개의 기후변화 시나리오...'스트레스테스트' 가시화
2017년 출범한 NGFS는 이런 문제 의식 아래 중앙은행 정책 운용에 기후변화 위험을 반영하는 방법을 검토해왔다. 지난해 6월에는 기후변화가 금융기관에 미칠 영향을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국제 비교를 위한 표준화를 목표로 한 실천지침을 내놓기도 했다.
지침은 3개의 기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다.
①산업혁명 이후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21세기 말까지 2도보다 상당히 낮게 유지한다는 파리협정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절한 정책을 실시하는 경우,
②2030년께까지 각국이 공약한 기존 탄소배출량 삭감 목표를 실현하는 것 외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지구 온도 상승폭이 4도에 근접하는 경우,
③2030년까지는 ②와 같지만, 파리협정 목표 달성을 위해 급속히 상당한 탄소가격 인상 등의 추가 대책을 취해 경제에 큰 부담이 발생하는 경우 등이다.
중앙은행들은 이같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2050년까지의 은행 자산과 보험사 부채 등의 건전성을 검증하는 스트레스테스트를 실시할 수 있다.
NGFS에는 한국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89개 중앙은행과 금융감독기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연준은 지난해 12월 가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