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 29일 한화석유화학과 대림산업은 각각 이사회를 열고 양사 NCC(나프타분해설비) 통합과 주력제품 위주 사업교환을 위한 영업양수도를 결의했다.
외환위기 직후 국내 산업계에 정부 주도의 '빅딜'이라는 용어가 매일 언론 지상에 오르내릴 때 업계 자율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아주 이례적인 모범사례로 기록되는 사건이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이를 "민간이 만든 구조조정 모델"이라 치켜세웠다.
한화와 대림은 이날 NCC 부문을 각각 6060억원, 8650억원에 양도, 총자산 1조4000억원 규모의 여천NCC를 연내 설립키로 하고 같은 해 12월 28일 공식 출범시켰다. 이에 따라 여천 NCC는 대림산업 73만톤과 한화석유화학 49만톤을 합쳐 총 122만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아시아 최대 NCC 업체로 부상하게 됐다. 한화와 대림의 지분은 50대 50이었다. 사실상 공동경영인 셈이다.
NCC는 'Naphtha Cracking Center'의 약자로, 나프타를 열분해해 석유화학 기초 원료를 생산하는 시설을 의미한다. 합성섬유, 플라스틱, 전자부품 등 다양한 산업에 필수적인 원료들이다.
여천NCC는 한때 국내 최대 수준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등 절대우위에 서면서 25년간 4조4000억원의 누적 배당금을 양대 주주에 안기는 효자 기업이 되었다.
당시 빅딜을 성사시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이준용 DL그룹 명예회장은 경기고 동문이자 사돈 관계이다. 김승연 회장의 사촌 형인 김요섭씨의 아들이 이준용 명예회장의 막내딸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50대 50이라는 수평적인 관계가 가능했다는 말이 재계에서는 흘러나왔다.
여천NCC는 별도로 운영될 때에 비해 구매 단가를 낮출 수 있는 데다 여유 시설을 활용할 수 있고 물류비용, 원가 등을 절감하면서 2017년 영업이익이 1조원을 돌파하는 등 순항했지만 2020년대 들어 점차 위기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즈음부터 세계 석유화학 업계는 중국 기업들의 저가공세에 따른 가격 전쟁, 기술 전환에 따른 막대한 규모의 예산 전쟁,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규제 등과 싸우면서 업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는데 여천NCC는 지분 갈등과 투자 지체로 멈춰섰다.
기업에게 사망선고라 할 수 있는 '부도' 운운의 말이 나올 때까지 갈등을 빚다가 한화솔루션에 이어 DL그룹이 지난 11일 2000억원 정도의 긴급수혈을 결정하면서 일단 위기는 벗어난 것 같지만, 책임 공방을 둘러싼 공동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의 공방전이 증폭되고 있어 앞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한화 측은 DL그룹이 유상증자를 결정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현금 지원 규모를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을 문제삼고 있다. 지난달 30일 김종현 DL케미칼 대표가 "워크아웃이 여천NCC를 살릴 유일한 방법일 것 같다. 계속 돈을 투입하는 구조는 DL에 과도한 리스크"라고 주장한 대목에 대해 한화 측은 여전히 의구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DL 측에서 워크아웃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전국화학석유식품산업노동조합 여천NCC지회 조합원은 한화빌딩 앞에 '한화그룹의 여천NCC에 대한 신뢰와 지원에 깊이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게시하기도 했다.
한화 측은 또 "올해 초 여천NCC가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에틸렌, C4R1 등 제품 저가 공급으로 추징액 1006억원을 부과받았고 DL과의 거래로 발생한 추징액이 962억원(96%)"이라고 책임경영을 강조하자 DL 측이 다시 반박자료를 제시하는 등 양사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이해욱 DL그룹 회장의 경영 판단이 25년 전에 이뤄졌던 50대 50이라는 지분구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도 있어 최악의 경우 합의 없는 폐업 수순까지 갈 수도 있다는 비관론까지 등장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천NCC는 2022년 적자 전환한 데 이어 대규모 손실이 이어져 1분기 말 기준 부채비율은 무려 280.5%에 달한다. 여천NCC의 단기차입금은 1조원에 가까운데 장기차입금 중 1년 내 만기가 도래하는 유동성장기차입금은 1100억원으로 채권자는 한국산업은행이다. 은행권에도 비상이 걸린 것은 당연하다.
◇트럼프 대통령도 부러워하는 우리 조선산업을 살려낸 구조조정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울산 울주군 반구천의 암각화가 지난 7월 1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필자는 10여년 전 일이 문득 떠올랐다.
당시 어느 쯤인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조원동씨를 사석에서 만났는데 반구천의 암각화 이야기를 꺼내면서 "거기 그림을 보면 선사시대 때부터 우리 선조들이 바다에서 도전적인 삶을 살았던 내용이 나온다. 우리 민족의 DNA와 조선산업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 측면에서 양적완화라는 극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업을 살려야 한다는 강봉균 위원장의 말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조선해양산업이 반도체에 이어 우리 수출의 중추를 이루는 산업이라며,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빅3'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40%를 넘는데 일시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정부가 방치하면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2015년 무렵부터 한국 조선업계는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글로벌 해운 경기 침체, 해양플랜트 수주 실패, 과잉설비 등 구조적 병이 너무 깊어 일각에서는 "철강, 조선, 자동차 등 중후장대형(重厚張大型) 산업구조에서 탈피하는 것이 한국경제의 살 길이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조 전 수석이 공감한다던 강봉균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201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강봉균 당시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한국판 양적완화'를 핵심 공약으로 제안했다. 산업은행이 조선·해운 등 주력 산업에 대해 더욱 공격적인 금융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한국은행이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강 위원장의 구상은 산업은행이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을 대거 매입하고, 한국은행이 이 과정에서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구조조정과 신성장동력 투자를 촉진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하자는 취지였다.
당시 강 위원장은 한국은행이 산금채는 몰론이고 MBS(주택저당증권)까지 매입해서 가계부채 부담을 완화하고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낮춰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 위원장의 구상이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방안이라는 등 광범위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자 여러 논의를 거쳐 한국은행과 정부가 각각 11조원과 1조원을 출자해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라는 특수목적법인(SPV)을 설립하는 방안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이 법인이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하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은 살아남았고, 대우조선은 매각됐다. 국내 조선 산업은 다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위치로 올라섰다. 구조조정은 산업의 생명선임을 외환위기 이후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이재명 정부가 미국 정부와의 관세협상에서 1500억달러가 투입되는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를 제안한 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돌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조선업은 이제 압도적인 국제 경쟁력을 증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미 해군이 직접 나서 한국 조선산업과의 협업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기사화가 된 상황이다.
◇여천NCC는 물론 한국 석유화학산업 전반을 짓누르는 불황의 그림자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최근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와 관련한 보고서에서 동북아 시장의 다운턴이 2030년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크며, 2035년경이 돼야 겨우 정상 수준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분석하면서 '버티기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특히 한국 석유화학 제품은 대부분 차별화가 어려운 범용 제품 중심이라 수출 관세 부담과 낮은 마진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 간 협력을 사실상 금지하고 있는 공정거래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산업 복합단지별 사업 재편을 위해 협업이 가능하도록 법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BCG는 중국의 경우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에 착수해 에틸렌 80만톤, 폴리에틸렌(PE) 20만톤 이하 규모의 범용 설비는 신규 증설을 제한하기로 했다고 분석하고, 일본 역시 선제적으로 감산에 돌입, 2026~2028년까지 전체 에틸렌 생산능력(670만톤) 중 36%인 약 240만톤 규모를 감축할 계획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한국 관련 기업들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LG화학 석화 부문은 지난 2분기 904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롯데케미칼의 경우 1분기 1341억원에 이어 2분기에도 749억원의 영업손실이 이어졌다. 한화솔루션 역시 태양광 등 신성장 부문 때문에 버티고 있지, 주력인 석화사업 부진은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처럼 지금 석유화학 산업이 10여년전 딱 그때의 조선업과 비슷하다.
경쟁력의 근간이던 저원가 시대는 끝났고, 중국발 과잉공급은 멈출 기미가 없다. 여러 악재 속에서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수익성이 뚝 떨어졌지만 업종 전체로 보면 지난해 약 480억달러(약 66조6000억원)의 수출을 달성할 정도로 여전히 한국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윤석열 정부 때인 지난해 12월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한 적이 있다. 석유화학 업계 등에 총 3조원의 정책금융을 공급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지만, 국내 정치가 극심한 혼돈을 겪으면서 후속조치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제 이재명 정부가 나서 한국 석화산업을 재정립할 때이다.
정부는 무엇보다 겹치기 중복투자와 과잉경쟁을 막기 위한 기업간 전략적 제휴를 제시하면서 '그린화학', '고부가 원료화' 등 기술 분야에서도 정부가 지원할 몫을 분명히 하는 교통정리를 확실히 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구조조정을 실현시킬 전문가 조직이 이재명 정부 안에서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당정간 컨트롤타워도, 청와대나 총리실의 산업조정 전담 라인도 실체를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진보정권이었던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강봉균 재정경제부 장관이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직후, 구조조정 전담 라인으로 활약하면서 5대 부문 구조조정(금융·기업·공공·노동·법·제도)을 추진하면서 은행 통폐합, 대우그룹 해체, 기업 구조조정촉진법 등을 추진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카드사 구조조정과 현대건설 채권단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보수정권이었던 이명박 정부 때는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이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구조조정을 하면서 저축은행 정리 작업을 이끌었고, 박근혜 정부 때도 전문가들이 나서 조선산업 구조조정을 수행했다.
구조조정은 산업정책의 핵심이다. 제대로 된 칼을 써야 산업의 근간이 되는 뼈와 살이 함께 베어지는 실수를 피할 수 있다. 구조조정을 완벽에 가깝게 실현시킬 수 있는 칼잡이를 이재명 정부가 하루라도 빨리 찾아내기를 바랄 뿐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관련기사
- [이용웅 칼럼]이란 중심축의 '시아파 벨트' 파괴 나선 이스라엘…트럼프의 득실은
- [이용웅 칼럼]민생지원금 담은 20조 추경, '기본소득'으로 가는 마중물인가
- [이용웅 칼럼]나토 GDP 5% 국방비로…한국에는 위기이자 기회인가
- [이용웅 칼럼]'시진핑 실각설' 왜 반복되는가
- [이용웅 칼럼]3년 연속 폭등 중인 독일 증시…'유럽의 병자' 맞나
- [이용웅 칼럼]'지니어스법' 통과, 스테이블코인 전쟁에서 한국은 살아남을까
- [이용웅 칼럼]'케이팝 데몬 헌터스' 돌풍, 한류의 끝은
- [이용웅 칼럼]'왜 한국에는 피그마가 없는가'라는 질문이 '블랙프라이데이' 질문보다 앞서야
- [마켓+]'벼랑 끝' 여천NCC 두고 한화-DL 갈등 격화…"사실왜곡"·"모럴 해저드" 비난
- DL케미칼, 여천NCC에 1500억 자금 지원 결정…부도 위기 면했다
- [이용웅 칼럼]한미정상회담, 트럼프 체면 살리고 실리 챙기는 길 찾아야
- 정부·업계, 석유화학 과잉설비 370만t 감축 추진…"무임승차는 없다"
- [이용웅 칼럼]중국식 국가자본주의 닮아가는 트럼프 행정부, 삼성 지분싸움으로 넘어갈까
- [이용웅 칼럼]본격화되는 확장재정 시대, 아베노믹스의 '세 번째 화살' 기억해야
- [이용웅 칼럼]AI에 모든 것을 묻는 일상, 위험한 게임이 시작됐다
- [이용웅 칼럼]효성은 최종무기 '정경유착'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 [이용웅 칼럼]위기의 한미관세협상, 3500억달러 대미투자 국내기업 지원에 돌린다면
- [이용웅 칼럼]조지아주 사태 원인된 제지공장 폐쇄에 숨겨진 뜻은
- [이용웅 칼럼]감정의 파고를 넘어, 한중관계의 미래를 위한 성찰
- [이용웅 칼럼]9월 수출 최대치의 이면, 기회인가 경고인가
- [마켓+]석화업계 자율 구조조정 시동…롯데케미칼, 대산 NCC 중단 '초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