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주필
이용웅 주필

지난주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공장 건설 현장에서 한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검거된 이후 일주일만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한미관계는 일촉즉발의 위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우리 근로자들이 미국에서 일할 수 있는 합법적인 취업비자 대신에 관광비자로 들어가 공장건설에 종사한 문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미국에 공장을 지어주는 근로자들을 쇠사슬로 묶어 연행하고 또 그런 영상을 공개한 일련의 과정에서 한미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이런 와중에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관세협상을 통해 합의한 3500억달러(약 486조원)를 당장 현금으로 집행하지 않을 경우 기존의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일본 제품에 대한 관세는 15%로 확정했지만 한국은 25%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경고이다. 그는 일본의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일본이 투자금을 회수할 때까지 미·일이 50대 50으로 수익을 나누고, 이후엔 미국이 90%를 가져간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들은 이같은 소식을 접하고 "도대체 뭔 소리냐"고 전혀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8월 초 "3500억달러는 보증 한도라고 보는 게 제일 정확하다"며 "보증이 가장 주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보통 국내 기업 등이 대규모 해외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 등 국내 수출신용기관에서 대출과 보증을 제공한다. 펀드나 법인 등에 현금을 직접 넣는 경우는 보기 힘들고 또 그럴 여유도 없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러트닉 장관은 지난 11일(현지시간) CNBC 방송에 출연해 "미국 내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고, 여기에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넣으라"고 요구했다. 앞에 인용한 김용범 실장의 발언과는 아예 궤를 달리하고 있다. 

김 실장 등 우리 정부 관계자들만 현금출자가 아니고 보증 금액일뿐이라고 설명했었고,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3500억달러라는 숫자는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하고 어쨌든 우리 대미수출품 관세는 줄어들 것이라고 판단하면서 한미정상회담 결과를 지지했던 게 저간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해 러트닉 장관과 만나 협상을 조율했지만 뚜렸한 성과없이 14일 귀국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이 이와 관련해 "한미가 서로의 영점을 맞춰가는 중"이라며 "우리는 국익이 최대한 관철되는 지점으로 영점을 맞추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상황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 현지에서 한미 관세협상 관련 후속 협의를 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4일 오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4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나는 다른 나라나 해외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하는 것을 겁먹게 하거나 의욕을 꺾고 싶지 않다"면서 외국 업체가 미국 노동자들에게 전문 기술을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고 밝혔지만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5500억 대미투자 계획 놓고 일본 내부 여론도 찬반으로 갈려

러트닉 장관은 일본이 5500억달러를 바로 현금으로 미국에 지원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실재는 전혀 다르다. 일본 역시 5500억달러 중 상당 부분이 이미 계획되었거나 추진 중인 투자 또는 일본 기업의 기존 투자 계획과 겹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아카자와 료세이 일본 경제재생상은 NHK와의 인터뷰에서 지분 투자가 5500억달러 중 약 1~2%를 차지할 것이며, 대부분이 대출과 보증의 형태로 나올 것임을 시사했다. 

그는 또 미국이 패키지 이익의 90%를 보유할 것이라는 백악관의 성명에 대한 질문에 이 수치가 자기자본 투자 수익만을 의미하며 이는 전체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밝혔지만 의구심은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도 불평등 협상이라는 불만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마이니치, 산케이 등 유력지들도 일제히 "최악은 면했지만 앞으로 미국이 의문투성이의 투자 청구서를 일본에 보낼지 모른다"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아카자와 재생상은 일본이 트럼프의 현 임기 동안 5500억달러의 투자를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는데 러트닉 장관은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3500억달러를 현금으로 넣으라고 요구하는 아주 기막힌 상황이 된 것이다. 

러트닉 장관은 "일본은 우리에게 5500억달러를 주기로 했다. 그 돈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라며 "알래스카 송유관을 건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짓고, 전력망을 개선하고, 미국에서 제네릭 항생제를 만들기로 했다"고 설명했지만 일본이 5500억달러를 "어디서 꺼내서" 한꺼번에 지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공적 금융기관의 대출·보증, 민간 기업의 투자, 지분 투자, 정책 인센티브 등을 혼합한 형태로 수년간 분산하여 "약속+실행 가능성 있는 투자 계획"으로 조달할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일본이 아무리 기축통화국이라고 해도 아무렇게나 돈을 찍어내 미국에 줄 수는 없는 일이고, 일본 내부에서도 미국에 대한 투자를 완성하려면 자국 내 관련 법령부터 정리해야 한다.  

일본이 준비한 구체적인 자금 조달 계획을 보면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에서 2000억달러 규모의 정책금융을 제공하고 대형은행 및 연기금이 1500억달러를 마련한다. 민간기업에서는 1000억달러를 직접 투자하고 국채발행 등을 통해 1000억달러의 재정을 조달한다. 이렇게 조성된 자금은 미국 재무부와 JBIC가 공동 운용하는 'US-JP 전략적 투자 퍼실리티' 펀드를 통해 집행된다. 

그래픽=연합뉴스
그래픽=연합뉴스

우리가 준비한 3500억달러 투자계획보다 구체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당장 현금이 들어가는 방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서명을 했고 한국은 서명을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남들은 사인(sign·서명)하는데 넌 왜 사인 못 하냐"고 한다며 "(우리한테) 좋으면 사인해야 되는데 이익이 안 되는 사인을 왜 하냐"고 말했다.

어쨌든 이 대통령은 최종적으로 국익에 도움되는 협상안에 사인하겠다는 거고, 지금 협의 수준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구체적인 실무협상에서 전혀 진척된 내용이 없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밖에 없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일본의 경우와는 또 다른 이유 모를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어 국민의 입장에서는 무척 답답한 상황이다.    

◇불투명한 미국경제에 사활을 걸기보다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에 3500억달러를 투입한다면...   

우리 정부가 미국에 약속했다고 하는 3500억달러라는 액수는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15%에 달하고 4163억달러 규모의 외환보유고와 맞먹는 수준이다. 우리나라보다 국가 GDP가 2배가 넘는 일본이 약속했다는 5500억달러와 비교하더라도 너무 많다. 어찌 보면 한미FTA(자유무역협정) 이후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얻은 무역흑자의 대부분을 다시 돌려준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협상 초기 미국은 4000억달러 투자를 요구했고 우리는 1000억달러를 제시하다 결국 3500억달러 선에서 정상회담 직전 1차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액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 정부는 미국에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직까지 미국의 반응은 미온적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요즘 시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AI(인공지능) 거품론이 현실화되고 관세전쟁의 후유증으로 미국경제가 침체국면에 들어간다면 굳이 3500억달러나 투자해 미국시장에 몰입을 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디스애널리틱스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마크 잔디는 지난 8월 미국 경제와 관련해 "고용시장 침체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징후를 찾고 있다. 만약 기업들이 해고를 시작한다면, 이는 단순한 고용 침체를 넘어 전체적인 경기침체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농업부문(nonfarm payrolls)의 일자리가 예상보다 크게 줄었고, 실업률도 올라가는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미국 전체 주 중 상당수가 현재 경기침체 상태거나 곧 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상태로 분류된다면서 약 3분의 1 주(state)가 위험군이고, 또 다른 3분의 1은 성장둔화하였으며, 나머지는 아직 확장(expansion) 국면이나 성장세가 약하다는 것이다. 

미국 실업률(파랑, 오른쪽 %)과 비농업 부문 고용자수(천명) 추이 /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세계 최대 헤지펀드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 설립자인 레이 달리오는 지난 8일 자신의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미국과 전 세계의 부채 부담, 각국 정부가 이에 대응하는 방식들을 보면 경기침체 속에서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 경기침체)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미국 경제가 이들의 경고처럼 실재 침체기에 들어가고 AI 거품이 터진다면 수익의 9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불만은 차라리 사치이고 아예 원금 회수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선임경제학자는 11일(현지시간) 연구센터 홈페이지에 "한국의 경우 25% 관세 부과시 줄어드는 대미 수출액의 규모를 125억달러(약 17조원)로 가정한다면, 이를 보호하기 위해 3500억달러를 투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베이커는 또 "트럼프는 자신이 맺은 어떤 거래에도 구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내년, 내후년, 혹은 세 번째 임기 어느 시점에서든 쉽게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더 나아가 한국 등은 "트럼프의 요구 금액 20분의 1만 사용해서 수출 감소로 피해를 본 노동자와 기업을 지원하면 훨씬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3500억달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외교, 산업정책, 금융, 기술 자립도, 그리고 국민 정서까지 얽혀 있는 중대한 전략적 선택이다. 지금처럼 미국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방식의 투자보다는, 일본처럼 장기계획과 구체적인 자금 조달 전략을 토대로 유리한 조건을 확보한 뒤 협상에 임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만약 이러한 협상 조건조차 확보하기 어렵다면, 차라리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국내 산업구조 고도화,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 중소기업 회생, 소외계층 지원 등 실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분야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 전체에 훨씬 더 이익이 될 수 있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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