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년 프랑스에 콜레라가 창궐했다. 역병은 위생환경이 열악한 파리 빈민가부터 휩쓸기 시작하더니 금새 나라 전체로 번졌다. 파리에서만 약 65만명의 시민 중 3%에 달하는 2만명이 영문도 모른 채 숨졌다. 프랑스 전역에서는 희생자가 10만명이나 됐다
콜레라가 물러간 뒤에는 호황이 찾아왔다. 프랑스 경제는 강력한 회복세를 뽐냈다. 덕분에 프랑스는 영국을 따라 산업혁명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동시에 또 다른 혁명도 일어났다. 콜레라에 가장 취약했던 하층민들이 기득권에 저항하고 나섰다. 파리 곳곳에서 폭동이 잇따랐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배경으로 삼은 혁명을 촉발한 게 바로 당시 콜레라였다. 프랑스는 수년간 정치불안에 따른 대혼란을 겪었다.
◇팬데믹 역사의 교훈..."경기회복이 다가 아니다"
1810년대 말 인도를 시작으로 아시아, 러시아, 유럽을 거쳐 신대륙까지 번진 콜레라는 코로나19와 같은 세계적인 전염병 '팬데믹'이었다.
프랑스에 콜로라가 창궐했을 때 하층민이 직격탄을 맞았듯, 코로나19도 취약계층에 가장 큰 타격을 줬다. 그 사이 부자들은 코로나19발 재정·통화 부양정책이 일으킨 유동성 홍수 덕에 재산을 불렸다. 프랑스 민중이 콜레라를 피해 해외로 도피한 기득권층을 맹렬히 비난하며 봉기를 일으켰을 때만큼이나 코로나19 사태가 부채질한 양극화는 계층 갈등을 키우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사태로 침체됐던 주요국 경제도 급격한 반전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올해 성장률이 7%에 근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코로나19 사태 전 2% 수준의 밋밋한 성장세가 고민이었는데 말이다.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등 미국과 함께 주요 7개국(G7)으로 꼽히는 나라들도 올해 과거 평균치보다 훨씬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25일 전쟁이나 팬데믹 같은 비금융적인 큰 혼란 뒤에는 최근 세계 경제 전망처럼 국내총생산(GDP)이 다시 늘어난다는 게 역사가 시사하는 바라고 지적했다. 다만 G7 경제가 동시에 고속성장하는 건 18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흔치 않은 일로, 1950년대 전후 호황기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전쟁·팬데믹 이후의 경기회복 역사에서 더 눈여겨 볼 교훈이 세 가지 있다고 지적했다.
①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소비를 하지만, 불확실성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②팬데믹은 기존 경제구조를 뒤집고 새로운 시도를 부추긴다.
③정치적 격변이 따르기 마련인데, 이는 경제적으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광란의 20년대'?...소비보다 불확실성
전쟁이나 팬데믹 사태가 한창일 때는 소비 기회가 줄어 저축이 늘기 마련이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극심할 때도 그랬다.
영국에서는 천연두가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초중반 가계저축이 두 배로 늘었다. 1차 대전 때 일본에서는 은행에 쌓인 저축이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스페인독감이 유행한 1919~20년 미국인들도 저축을 대거 늘렸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더 늘어난 저축은 1941~45년 GDP의 40%에 달했다.
삶이 정상을 되찾기 시작하면 억눌렸던 욕망이 터져나와 흥청망청하기 쉽다. 중세시대 유럽을 휩쓴 흑사병 뒤에 '난교'가 성행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이코노미스트는 큰 위기 뒤에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증거가 많지 않다고 꼬집었다.
미국은 스페인 독감을 극복한 뒤인 1920년대에 대호황을 누렸다. 이때를 흔히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백신이 당시처럼 급격한 경기반등을 일으켜 '광란의 2020년대'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한창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광란의 20년대도 처음에는 이름만큼 강렬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49년 미국 소비자들이 초과저축의 약 20%밖에 소비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미국 정부는 1940년대 말 경기보고서에서 경기침체를 우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미국 경제는 실제로 1948~49년 침체를 겪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불확실성을 우려한 소비자들이 신중하게 행동한 게 팬데믹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역사적 사례가 거의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짚었다. 최근 한창인 인플레이션 우려도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기우일 수 있다는 얘기다.
◇팬데믹 끝나자 '대항해'...경제구조 변혁
팬데믹 뒤의 경기호황은 경제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역병을 겪은 이들이 부쩍 대담해지면서 특히 공급 측면에서 변화가 컸다.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방식과 생산지가 바뀌었다.
한 예로 유럽인들은 흑사병 이후 새로운 땅을 찾아 항해에 나섰다. 대항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흑사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을 보낸 이들에게는 덜 위험한 일이 됐다.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미국 예일대 교수는 최근 낸 책(Apollo's Arrow)에서 스페인 독감 이후 '위험감수'(risk-taking)라는 표현이 늘었다고 지적했다. 스타트업 수가 1919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했다고 본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1948년 자료도 이를 뒷받침한다.
팬데믹이 로봇처럼 노동력을 절약하는 기술의 보급을 촉진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역시 공급 측면의 변화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에볼라 같은 최근 팬데믹 사태들이 로봇 도입을 가속화했다며, 건강위협이 심각하고 상당한 경기침체가 동반됐을 때 특히 그랬다고 분석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도 자동화에 속도가 붙었고, 흑사병과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연결짓는 이들도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자동화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팬데믹 이후 노동환경이 더 나아졌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이 지난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 사태 이후에는 실질임금이 오르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역병이 노동자들을 도태시키고, 살아남은 이들이 협상에 더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는 셈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정치불안 우려..."호황일 때 즐겨라"
이코노미스트는 팬데믹 이후의 임금상승이 정치격변의 산물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고통 받은 이들이 많다면 사회적 관심은 국가경제의 핵심인 노동자들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전염병 감염 우려가 노동자를 대신할 로봇 수요를 높이기도 했지만, 팬데믹발 침체로 위기에 몰린 노동자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도 폭을 넓힌 게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맞아 세계 각국 정부가 근래 유례없는 규모의 재정확장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주요국 정부들은 실업률을 낮추는 게 우선이라며 공공부채 확대에 따른 재정건전성 악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감수하고 돈을 풀고 있다.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취약계층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정치혼란을 야기한 경우가 많다. 전부터 상존했던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 거세진 경우도 많다. 2013~2016년 에볼라가 창궐한 서아프리카에서는 폭력적인 시민봉기가 40% 늘었다고 한다.
IMF는 최근 보고서에서 에볼라, 사스, 지카 등 2001년 이후 133개국에서 발병한 5개 팬데믹이 하나같이 상당한 수준의 사회불안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IMF의 또 다른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이 끝난 뒤 2년째에 사회불안이 절정에 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역사의 교훈들을 근거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호황이 지속되는 동안은 즐기라며, 머잖아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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