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압력 고조, ECB 조기 테이퍼링 전망에
'獨국채 숏베팅은 금물' 시장 불문율 흔들려
지난 5일 독일 공영방송 ZDF는 세계적인 원자재(상품) 가격 상승이 '하이퍼인플레이션'(초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인플레이션에 대한 경계 수위를 높였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은 물가상승률이 월간 50%를 넘는 경우를 말한다. 독일이 1920년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경험한 대로다.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절정일 때는 한 달 새 물가가 3만% 가까이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배상금을 갚느라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낸 게 화근이었다. 화폐가치가 폭락해 뭐라도 사려면 수레로 돈을 실어날라야 했다. 붕괴된 경제는 히틀러의 나치즘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독일이 보수적인 재정정책을 고수하며 다른 어떤 나라보다 인플레이션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유다.
덕분에 국제 채권시장에서는 '독일 국채에 매도 베팅을 하지 말라'(Never Short the Bund)라는 말이 불문율로 통할 정도라고 한다. 독일 국채는 미국 국채에 버금가는 유럽 최고 안전자산인데다, 독일 정부가 인플레이션을 극도로 혐오하는 만큼 채권이 취약한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다.
블룸버그는 16일 최근 이 불문율이 흔들리고 있는 게 심상치 않다고 짚었다. 통신은 독일 국채에 매도 베팅을 하는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며, 이는 글로벌 금융시장에 일대 충격을 예고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 배경엔 인플레이션 위협과 유럽중앙은행(ECB)의 조기 통화긴축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獨국채 숏베팅 금물?...흔들리는 '불문율'
캐나다 5대 은행 가운데 하나인 토론토도미니언(TD)뱅크는 지난주 독일 국채에 대한 매수 추천을 중단했다. 영국 투자은행 냇웨스트마켓은 독일 국채의 슈퍼사이클(장기랠리)이 끝났다며, 매도 의견을 냈다.
두 은행이 사실상 독일 국채에 매도 베팅을 하고 나선 건 독일 국채 금리 상승세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TD뱅크는 독일 국채 금리가 손절매 수준을 웃돌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기준물인 10년 만기 독일 국채 금리는 2019년 약 2년 만에 마이너스(-)로 떨어져 지난해 3월 -0.854%로 사상 최저점을 기록한 뒤 올 들어, 특히 최근 들어 급반등했다. 지난 14일 종가는 -0.134%. 골드만삭스, ING그룹 등은 10년 만기 독일 국채 금리가 연말이면 0%에 도달할 것으로 본다.
채권 금리 상승은 채권 가격 하락을 의미한다. 매도 압력이 크다는 얘기다. 유럽 최고 안전자산인 독일 국채에 투매 바람이 일고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탈리아 은행 메디올라눔의 찰스 디벨 머니매니저는 "모두가 인플레이션 패닉 절정에 있다"며 "이는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ECB 조기 긴축 우려 확산...올 여름 테이퍼링?
전문가들은 코로나19 백신 보급에 따른 경기회복 기대와 맞물린 인플레이션 우려가 독일 국채의 투자 매력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정수익을 보장하는 채권이 본질적으로 인플레이션에 취약한 데다, ECB가 조만간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채권매입(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독일 국채는 ECB가 매입하는 채권 가운데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ECB가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면 독일 국채 수요가 줄어 가격이 떨어지고 금리는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시장에서는 유로존의 물가상승률이 연내에 ECB의 목표치인 2%를 넘어설 것으로 본다. 유로존 물가상승률은 지난 3월에는 0.9%(전년대비), 4월은 1.6%(예비치)를 나타냈는데, 3분기에는 2.2%, 4분기에는 2.3%에 이를 전망이다. 독일의 물가상승률은 지난달에 2019년 이후 처음으로 2%를 돌파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ZDF의 하이퍼인플레이션 경고는 너무 과장됐지만, 최근 지표들로 보면 물가상승 압력이 한동안 급격히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부당한 주장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도 최근 '일시적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고한 바 있다.
HSBC는 ECB가 올 여름 테이퍼링을 시작할 수 있다는 관측이 세를 불리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에서는 인플레이션에 민감한 독일이 유럽 최대 경제국으로서 ECB 내 통화긴축 논의를 주도할 것으로 본다.
이같은 전망은 이탈리아, 스페인 등 재정위기를 겪은 유로존 '주변국' 국채 금리도 띄어 올리고 있다. 주변국 국채는 안 그래도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아 저금리 환경에서 투자 매력이 컸지만, ECB가 양적완화 지원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면 재정난이 다시 심각해질 수 있다. 10년 만기 이탈리아 국채 금리는 최근 1.07% 수준인데,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1년에는 한때 7.30% 가까이 치솟았다.
◇마이너스 금리 채권 급감, 유럽 회사채도 역풍
미국 국채 금리도 올 들어 경기회복 기대와 인플레이션 우려 속에 오름세가 돋보이지만, 물가상승 압력이 낮기로 유명한 독일에서도 국채 금리가 뛰자 파장이 전방위로 번지고 있는 모습이다.
전 세계 투자등급 채권 가운데 마이너스 금리를 품은 물량이 급감한 게 대표적이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발행한 마이너스 금리 채권은 2019년 전체의 30%가 넘었지만, 최근에는 20%도 안 된다. 발행액수로는 약 12조달러어치로 지난해 6월 이후 최저치가 됐다.
유럽 회사채도 타격을 받고 있다. 올해 유통시장에서 발행가격 미만에 팔린 우량등급 회사채가 전체의 80%에 이른다. 이달 초만 해도 50%를 밑돌았으니 손해를 본 거래가 최근 급증한 셈이다. 독일 국채 금리 상승세도 5월 들어 부쩍 가팔라졌다.
BofA글로벌리서치에 따르면 유럽 채권 투자자들은 최근 설문조사에서 회사채시장 랠리에 종지부를 찍을 잠재적인 악재 1순위로 ECB의 테이퍼링을, 그 다음으로는 10년 만기 독일 국채 금리의 플러스(+) 전환을 꼽았다.
한편 독일 국채 금리가 급등하고 있는 이유를 독일 정치 지형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선두로 부상한 녹색당이 독일의 보수적인 통화정책을 깰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