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인플레이션 거듭 추락..."인플레이션 안 일어나" 인식 확산
일본 총무성 통계국은 지난 19일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동월대비 0.1% 올랐다고 발표했다. 지난 9월 1년 만에 상승세(0.2%)로 돌아선 뒤 또 하락한 것이다.
신선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물가(일본에서는 '근원근원물가'라 함) 흐름은 더 심상치 않다. 지난해 8월부터 1년 넘게 변동률이 0% 이하를 맴돌고 있다. 10월에는 -0.7%로 지난 6월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세계 주요국에서 인플레이션 공포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디플레이션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미국이 6.2%, 영국이 4.2%를 기록했다. 각각 1990년 11월, 2011년 12월 이후 최고치다. 독일은 4.5%로 1993년 8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근월물가상승률 역시 각각 4.6%, 3.4%, 2.9%로 2% 수준인 중앙은행 목표치를 모두 훌쩍 넘어섰다.
◇'잃어버린 30년'에 인플레이션도 잊었다
일본은 1990년대 초 자산시장 거품이 터지면서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장기불황에 빠져들었다.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의 거듭된 노력에도 경기회복은 요원했고,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이 불황의 골을 키우는 악순환을 일으켰다. '잃어버린 10년'은 사실상 '잃어버린 30년'이 돼 일본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일자 최신호에서 그렇다고 일본이 인플레이션이라는 세계적인 추세에서 완전히 고립돼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짚었다. 지난달 일본의 생산자물가지수(PPI)가 전년동월대비 7.9% 올랐다는 것이다. 월간 기준으로 1980년 이후 가장 많이 뛰었다.
엔화 기준으로 38% 오른 수입물가가 전체 상승세를 주도했다. 특히 석유제품과 목재 가격이 1년 새 각각 45%, 57% 뛰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다만 일본의 생산자물가 상승세가 국내 요인으로 쉽게 상쇄됐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 요금 인하 정책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는 일종의 경기부양책의 하나로 통신사들을 압박하며 생활 필수품인 스마트폰의 요금 인하를 추진했다. 덕분에 CPI 항목 통신비 부담이 28% 줄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통신비 인하 효과가 없었어도 일본의 물가상승률이 BOJ 목표치를 한참 밑돌았을 것으로 봤다. 장기불황 속에 일본인들의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워낙 낮아졌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거품붕괴 이후 일본의 물가상승률이 BOJ 목표치인 2%를 웃돈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본인들 사이에 '인플레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해졌을 만하다.
◇25년 만에 100원 인상하고 '대국민 사과'
더욱이 일본 기업들은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소비자들에게 전가하길 꺼리기로 유명하다. 몇 년 전 일본의 한 빙과업체가 25년 만에 제품 가격을 10엔(약 100원) 올리면서 대국민 사과 광고를 내 화제가 됐을 정도다.
최근에는 일본 간장업체 기꼬만이 내년 2월부터 제품 가격을 4~10% 인상하겠다고 발표해 현지에서 주요 뉴스로 주목받았다. 기꼬만의 가격인상은 2008년 이후 14년 만이라고 한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일본 기업들이 가격인상을 꺼리는 건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한 디플레이션기에 생긴 습관 탓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의 소비회복세가 상대적으로 약한 것도 문제다. 일본의 민간지출은 3분기에도 감소세를 기록했다. 팬데믹 사태 영향에서 자유로웠던 2019년 말 수준을 아직 3.5% 밑돈다. 특히 일본에서는 주택, 자동차, 냉장고, TV 같은 내구재에 대한 소비가 사실상 지난 8년 내내 제자리 수준에 있다.
◇통화정책 한계...재정부양효과 두고봐야
BOJ는 제로금리와 양적완화(자산매입) 등 주요 중앙은행들이 현재 경기부양을 위해 두루 쓰고 있는 비상 통화완화 수단을 일찍이 도입했지만, 경기를 되살려 건강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데 줄곧 실패해왔다.
그럼에도 BOJ의 대담한 '실험'은 현재진행형이다. BOJ의 자산은 팬데믹 사태 전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03%에서 최근 134%로 늘었다. 양적완화로 쌓아올린 자산이다. 시중에 그만큼 많은 돈을 풀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기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자산은 GDP의 19%에서 36%로 늘었을 뿐이다. BOJ는 10년 만기 국채 금리를 0% 수준에 묶어두는 것을 목표로 양적완화를 지속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BOJ의 실패가 주는 교훈은 통화정책만으로는 수십년 동안 낮은 수준에 있던 일본의 기대인플레이션을 자극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약속한 대규모 재정부양 패키지가 실제 소비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조짐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