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불황의 무기력한 현실…FT "가격인상, 임금인상 요구 없어"
주요 선진국들이 수십년 만에 최고로 오른 인플레이션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8~9%로 정권을 위협할 정도다.
모든 선진국들이 치솟는 물가에 불안한 것은 아니다. 일본은 물가상승률이 높아야 2.5% 수준으로 다른 선진국들과 온도차가 확연하다.
같은 이유로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느라 서둘러 금리인상에 나선 반면 일본은행(BOJ)은 초완화적 통화정책을 회수할 의지가 전혀 없다. 통화완화는 보통 해당국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는 데도 말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주말판에서 이러한 극단적 온도차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장기불황으로 무기력해진 일본에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고, 기업들조차 비용 부담을 가격 인상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전가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수입물가 오를수록 디플레 압력 커져
FT는 일본에서는 인플레이션 심리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진단했다. 일본은 최근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원자재를 미국이나 영국 등에 비해 더 많이 수입해 인플레이션 압박이 더 심하지만 가격 상승과 임금인상으로는 사실상 전혀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다치 마사미치 UBS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에서는 인플레이션보다 오히려 물가하락세가 지속되는 디플레이션 심리가 더 고착화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일본에서 수입 물가 상승은 디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일본에서 인플레이션이 지속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이유"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미국과 유럽에서 기업들은 원료와 원자재 자격이 오르면 그 부담을 소비자들에게 떠넘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일본 기업들은 역풍을 우려해 가격을 올릴 꿈도 꾸지 않는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수십년 동안 제자리인 월급을 받으며 임금인상을 요구할 기력조차 없다.
일본 기업들은 높은 수입 물가를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대신 임금을 깎는 식으로 쪼그라드는 수익을 보전한다. 따라서 수입 물가 상승은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압력을 키우기 쉽다.
지난달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대비 2.5% 올랐다. 변동성이 높은 식품을 제외한 근원 CPI도 2.1% 상승해 7년 만에 최고치로 일본은행 목표(2%)를 넘겼다. 하지만 식품과 에너지를 모두 제외하면 인플레이션은 0.8%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이를 근거로 일본 경제의 기저 수요가 여전히 취약하다고 본다. BOJ도 마찬가지다. BOJ가 현재의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고 자신있게 판단하고 있는 이유다. 수입물가 인상 효과가 시스템 전반을 관통하고 나면 인플레이션도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日경제 현실은 美·유럽과 전혀 달라"
일본의 인플레이션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강도가 덜하고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외에도 많다.
우선 4월 인플레이션 수치에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가 지난해 모바일폰에 취한 관세 인하효과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일시적 감세효과를 뺀 기저 인플레이션은 실제 수치보다 낮다는 얘기다.
일본 경제가 아직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는 팬데믹 사태로 경제활동을 억제하는 조치들은 거의 없지만, 일본인들은 여전히 만일의 감염에 대비한 방역을 내재화했다.
더욱이 일본은 유학생이나 사업차 방문하는 외국인들을 제외한 해외 방문객들의 입국을 제한하며 소비지출을 강하게 억제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엔화 약세(엔저) 효과가 거의 소멸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엔저는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 대기업에 호재지만, 이들은 대부문 공급망을 중국으로 옮겼고 자본재 수요는 중국 경제 둔화에 타격을 받았다.
무라시마 키치 씨티그룹 일본 이코노미스트는 "원자재 가격 상승뿐 아니라 중국의 코로나19 폐쇄가 심각하다"며 "제조업체들이 올해 자본지출을 확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 역시 엔저 효과에 대해 일시적 횡재에 불과하다고 보고 임금을 올려 고정비용을 늘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BOJ는 이런 이유들로 인플레이션이 결국 가라앉을 것이라며, 경기과열을 걱정해 경제를 억제하는 대신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는 최근 연설에서 "에너지 가격에 따라 단기적으로 물가가 오르겠지만 지속력은 부족하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기대 인플레이션의 급등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경제의 현 상황은 미국, 유럽과 전혀 다르다고 재차 강조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신회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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