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보다 빨리 오르는 주택가격, 물가지표서 빠진 이유
주요 선진국에서는 지난 25년간 주택 가격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압도했다.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소비자물가상승률은 1995~2020년 연평균 3%를 밑돌았지만, 집값은 두 배가 넘는 6%가량 올랐다.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 지표가 구조적으로 저평가된 셈이라고 지적한다. 공식 물가지표에 의식주의 핵심인 주택 가격이 반영되지 않아 발생한 문제라는 것이다. 통계청 소비자물가지수(CPI) 조사 대상 품목에도 집세는 있지만, 집값은 들어 있지 않다.
중앙은행들의 지상과제는 물가안정이다.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정할 때 참고하는 핵심지표가 바로 물가지표다. 인플레이션 압력이 실제보다 덜 반영된 지표는 통화정책을 왜곡시키기 쉽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불거진 뒤 주요국에서 집값 급등세가 한창이다. 38개 OECD 회원국 주택 가격은 올해 1분기에 전년동기대비 9.4% 올랐다. 30년 만에 가장 가파른 상승세다. OECD 통계에 포함된 40개국 가운데 1분기에 집값이 떨어진 나라는 세 나라뿐이다. 관련 통계가 시작된 2000년 이후 가장 광범위한 집값 상승세다.
상황이 이러니 일부에선 물가지표에 집값을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대표적이다. ECB는 최근 20년 만의 통화정책전략 재검토를 통해 통계당국인 유로스타트에 집값을 공식 물가지표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다.
뉴질랜드 중앙은행(RBN)은 통화정책을 정할 때 물가지표 항목에서 제외되는 집값도 고려하기로 했다.
◇물가지표서 주택가격 빠진 이유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각국 정부가 인플레이션 수준을 가늠하는 데 제대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이다. 물가가 오르는 만큼 임금도 생활비 수준에 맞춰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모였다. 따라서 초기 물가지표의 초점은 식품가격에 모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가 조사 대상 품목으로 추가됐다.
물가지표 품목을 정기적으로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주택이 논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1953~83년 집값이 CPI 조사대상 품목에 들었다가 제외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수당과 연금을 물가에 연동시키는 데 따른 부담이 커지자, 정치권에서 인플레이션 수준을 낮추려 한 게 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CPI에 집값이 반영되지 않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인플레이션은 당장 소비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구매 비용 척도인데, 주택은 소비라기보다 '투자'로 보는 게 적절하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주택 가격이 안전한 보금자리 제공이라는 주택의 서비스 가치를 압도한다고 지적했다.
물가 항목에 포함된 자동차나 냉장고는 어떨까. 이들 제품도 주택처럼 수년에 걸쳐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다. 다만 주택보다 훨씬 빨리 가치(가격)가 떨어진다. 서비스 가치와 가격의 격차가 주택보다는 덜한 셈이다.
물가지표가 의식주의 '주'를 모두 무시하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처럼 대개 집세 등이 CPI에 반영된다. 집세는 집값과 달리 당장 소비하는 주거 서비스의 비용이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모기지)대출 이자 등이 포함되기도 한다.
◇집값 급등 책임 돌리기 안 돼
이코노미스트는 집값 변동을 인플레이션 지표에 반영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집값은 그 자체로 변동성이 클 수 있고, 집을 사는 데 직접 쓴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이유에서다.
한 예로 20년 살던 집을 팔고 새 집을 사는 경우, 집 주인은 20년 만에 집을 두 채 산 셈인데 그가 치른 비용은 두 채 값이 아니다. 집을 팔고 사는 게 보통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수십년짜리 모기지 대출 등이 포함되면 계산이 더 복잡해진다.
이코노미스트는 집값을 인플레이션 지표에 반영하면, 집값 안정을 이루기보다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을 재촉하기 쉽다고 봤다. 집을 사기 더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이유로 뉴질랜드가 중앙은행에 집값에 대한 책임을 더 지운 건 정치적 제스처라고 꼬집었다. 집값 급등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중앙은행에 떠넘긴 셈이라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그간의 여러 정책 변화 가운데 집값 안정에 더 효과를 낸 건 주택담보대출비율(LTV) 규제 강화 같은 조치들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각국 정부는 주택시장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야지, 다른 데로 책임을 돌릴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