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핀란드 실험

세계 곳곳에서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둘러싼 논의가 한창이다. 재산이나 소득, 노동 여부 등과 무관하게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액을 지급하는 게 기본소득이다. 그동안 주로 수면 아래서 논의돼온 급진적인 구상이 사회담론으로 급부상한 건 코로나19 팬데믹이 극단적으로 삶의 기반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3회(①기본소득 뭐길래 ②찬반논쟁 ③핀란드 실험)에 걸쳐 기본소득 논의를 집중 조명한다. <편집자주>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기본소득 논의가 세계적으로 급물살을 타면서 주목받고 있는 게 핀란드의 실험이다. 기본소득 찬반진영에서는 이 실험의 결과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2년간 매달 76만원을 준다면...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핀란드는 2017년 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2년간 기본소득 실험을 벌였다. 이 나라 사회보장시스템을 운용하는 사회보험국(KELA)이 주체가 됐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법에 따라, 임의로 선정된 이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실험이 여러 번 있었지만, 대개 특정지역에서 지원자들을 상대로 벌인 소규모 실험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핀란드에서는 2016년 11월에 실업수당을 받은 이들 가운데서 무작위로 선정한 2000명이 실험 대상이 됐다. 2년간 아무 조건 없이 매달 560유로(약 76만5000원)가 지급됐다. 다른 소득 유무, 실업상태에서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지 등은 따지지 않았다.

KELA는 지난 5월 웹사이트에 이번 실험에 대한 최종 결과를 공개했다. 요약하면 기본소득의 고용효과는 작았지만, 이를 받은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평안해지는 등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공식 결과는..."고용효과 작았지만, 삶의 질 높였다"

KELA는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내기 위해 참가자 가운데 81명(실험군)을 상대로 심층조사를 벌였다. 실업수당을 받는 이들을 대조군으로 삼아 결과를 비교했다.

가장 관심을 끈 대목은 기본수당의 고용촉진 효과였다. 핀란드 정부가 실업수당을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실험을 벌인 것도 고공행진하는 실업률로 골치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험이 시작된 2017년 1월 핀란드의 실업률은 9.2%에 달했다. 

고용 측면에서 실험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KELA는 "고용효과가 작았다(small)"고 평가했다. 평가 기간으로 삼은 2017년 11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1년간 고용일수가 실험군은 평균 78일, 대조군은 73일로 5일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반면 기본소득이 삶의 질을 높이는 효과는 뚜렷했다. 기본소득을 받은 이들이 평가한 삶의 만족도(0~10)는 평균 7.3이었는데, 대조군은 6.8에 그쳤다.

또 현재 가계 소득에 대한 평가에서는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한 비율이 실험군은 13%, 대조군은 8%였다. '잘 지낸다'고 답한 이는 실험군 47%, 대조군 44%였다. '먹고 살기 어렵다'고 밝힌 이는 실험군이 28%, 대조군이 32%, '간신히 살아간다'고 한 이는 실험군이 12%, 대조군은 15%였다.

기본소득을 받은 이들 가운데 우울증을 토로한 이는 22%였지만, 일반 실업자 중에는 32%나 됐다.

KELA는 기본소득을 받은 이들은 소득이나 경제적 행복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더 긍정적이었으며 삶에 대해서도 만족감이 컸고 우울증 같은 정신적인 문제도 덜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다.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결과[자료=사회보험국(KELA)]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결과[자료=사회보험국(KELA)]

◇성패논란..."근로의욕 자극 못했다" vs "근로의욕 꺾지 않았다"

국내 보수언론을 비롯해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편에서는 핀란드의 실험을 실패로 규정한다. 핀란드 정부가 당초 기본소득 실험을 확대하려던 계획을 포기한 게 실패를 방증하고 있다고 논리다. 핀란드는 이번 실험이 성공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핀란드 내부 평가도 비관적이었다. 핀란드 독립 싱크탱크인 데모스헬싱키는 대다수 핀란드 정치인과 매체들이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부정적으로 봤다며, 기본소득이 실험 참가자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데모스헬싱키는 그러면서 해외 평가는 정반대라고 했다. 많은 해외 논평가들은 아무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이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를 꺾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 반대론자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일정액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제도가 놀고 먹는 '배짱이'를 양산할 수 있다고 우려해왔다. 핀란드노동조합연맹(SAK)은 이번 실험을 앞두고 기본소득이 아이를 낳거나 은퇴가 가까워진 이들이 근로시간을 줄이게 하는 유인책이 돼 노동력 감소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KELA의 보고서를 보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데 따른 고용효과가 미미했을 뿐, 기본소득이 근로의욕을 꺾었다는 증거는 드러나지 않았다. 

영국 가디언, 미국 뉴욕타임스(NYT) 같은 유력 매체들도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이 고용을 늘리는 데 실패했다고 했을 뿐, 실험 전체를 실패로 규정하진 않았다.

◇실험 오류 지적도..."기본소득 실험 실패 아닌 핀란드의 실패"

기본소득 논의를 주도해온 전문가들은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기본소득의 실패'가 아닌 '핀란드의 실패'로 본다. 실험 자체에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이 많다.

우선 핀란드가 실험한 기본소득이 기본소득 정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유럽을 기반으로 풀뿌리 기본소득 운동을 펼쳐온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는 기본소득을 '재산 조사나 노동 의무 없이 모든 개인을 대상으로 한 무조건적인 현금 지급'이라고 정의한다. 재산 수준, 노동 여부 등을 따지지 않고 유아부터 고령자까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현금으로 지급하는 게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핀란드의 실험은 지급대상이 실업자로 제한됐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지미 오도넬 연구원은 KELA의 기본소득 실험 예비 결과가 나온 뒤인 지난해 12월 미국 사회주의 성향 매체인 자코뱅에 쓴 글에서 핀란드 정부의 압력으로 실험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했다. KELA의 연구자들은 당초 1만명에게 매월 1000유로를 지급하는 실험을 하려 했지만, 정부가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다는 듯 예산을 2000만유로로 못 박고 시간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미국 인터넷 경제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핀란드의 기본소득 실험은 미국이 1968~82년에 벌인 '마이너스 소득세'(negative income tax) 실험 규모에도 훨씬 못 미쳤다고 지적했다. 마이너스 소득세는 부자들의 소득에 세금을 물리듯 저소득층에 세금을 부과하는 대신 일정액의 보조금을 주는 것이다. 미국은 9000명가량을 대상으로 실험을 벌였지만, 당시에도 의미 있는 결과를 내기엔 실험 규모가 너무 작다는 평가를 받았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제인가족연구소의 마이클 스타인스 최고경영자(CEO)는 비즈니스인사이더에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이 이미 실업수당 등을 받고 있는 실업자들을 상대로만 이뤄진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기본소득을 받는 대신 실업수당을 비롯한 기존 복지 혜택 일부를 포기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결과, 기본소득을 받게 된 이들은 2017년 실업수당으로 5800유로, 사회부조금으로 940유로를 받았지만, 다른 실업자들은 같은 기간 실업수당으로 7300유로, 사회부조금으로 1300유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기본소득 지급 대상이 된 한 실험 참가자는 NYT에 실험기간 동안 늘어난 소득이 월간 50유로밖에 안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핀란드 정부가 2018년부터 시행한 '활성화모델'(activation model)이 기본소득 실험 결과를 왜곡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활성화모델은 실업자가 적극적인 구직활동 등을 하지 않는 경우 실업수당을 제한하도록 한 정책이다. 구직활동 여부 등을 따지지 않는 기본소득과 상충되는 셈이다. KELA는 활성화모델의 영향으로 기본소득 실험의 고용효과를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스타인스는 "다른 나라들이 핀란드의 실험 결과 때문에 기본소득을 추구하는 걸 단념하지 않길 바란다"며 "핀란드의 실험은 기본소득 실험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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