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 글로벌 증시에 낙관론이 차고 넘친다. 미국 월가에서는 증시 분위기가 내년엔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한창이다.
◇'TINA' 대신 'TRINA'...증시 낙관론 배경은
미국 투자은행 JP모건도 거들고 나섰다. 두브라브코 라코스-부하스 JP모건 미국 주식 전략가는 10일(현지시간) CNBC방송을 통해 내년 증시 환경이 수년 만에 최고, 이른바 '극락'(market nirvana) 같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글로벌 무역전쟁, 코로나19 팬데믹, 미국 대선 불확실성 같은 악재들이 일제히 누그러지는 내년 미국 증시에 무려 1조달러가 흘러들 것으로 봤다. S&P500지수가 25% 올라 4600선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다. 라코스-부하스에 따르면 현재 증시로 유입되고 있는 자금은 1940년대 이후 가장 큰 폭(전년대비 24%)으로 늘고 있다.
낙관론을 경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글로벌 증시 리서치업체인 앱솔루트스트래티지리서치(ASR)의 이언 하넷 공동 설립자 겸 수석 투자전략가는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에서 글로벌 증시에 대한 투자자들의 자기만족(complacency)이 곧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밸류에이션(주가 수준)이 과도하게 높은 데도 투자자들이 주식에 대해 비중확대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넷은 코로나19 팬데믹 공포에서 벗어나면서 투자자들이 증시를 낙관하는 이유가 바뀌고 있다고 짚었다. 고수익 투자처가 마땅치 않았던 팬데믹 사태 이전에는 "대안이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TINA)는 게 증시 강세론자들의 주문(mantra)이었는데, 'TINA'가 이젠 'TRINA'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TRINA는 '정말로 대안이 없다'(there really is no alternative)는 뜻이다.
팬데믹 사태에 놀란 주요국 중앙은행이 초저금리 기조 아래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많은 자금을 풀었으니 그럴 만하다. 채권 수익률(금리)이 곤두박질친 것이다.
하넷은 미국의 주가 수준이 닷컴버블 붕괴 직전인 2000년 1월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증시 강세론이 한창인 데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면서 그는 증시 낙관론에 3개의 가정이 전제돼 있다고 지적했다. ①'밸류에이션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②'금리가 한동안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③'코로나19 백신과 맞물린 느슨한 통화·재정정책이 우리를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것이다'가 그것이다.
◇美증시 밸류에이션 2000년 1월 이후 최고
하넷은 일련의 가정들을 모두 부정했다. 무엇보다 밸류에이션은 언제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단기적으로는 덜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밸류에이션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넷에 따르면 1950년 이후 미국 증시의 주가 수준을 반영하는 주가수익비율(PER)이 30배를 넘은 경우, 이후 10년에 걸쳐 증시 연간 수익률이 5%를 넘은 적이 없다. 때로는 -5%를 밑돌기도 했다고 한다. S&P500지수의 PER은 현재 30배가 넘는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EPS)으로 나눈 값이다. 팬데믹 여파로 기업들의 순익이 대체로 줄었는데 주가만 오르면서 PER이 높아진 셈이다.
하넷은 주가 수준을 판단하는 또 다른 척도인 '토빈의 Q'를 기준으로 봐도 현재 미국의 주가는 1950년 이후 최고였던 2000년 1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주식·채권 동시 고평가 결말은 파국?
최근 시장에서 밸류에이션을 무시하고 증시를 낙관하는 건 초저금리 기조가 유지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초저금리 기조로 채권 수익률이 낮은 수준에 머물면 증시로 돈이 몰릴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됐다.
하넷은 연준이 언제 정책 방향을 전환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경제와 실적 회복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충족되면 연준이 장기국채의 금리 하락을 유도하는 통화완화 기조를 고수하기 여의치 않을 것으로 봤다. 인플레이션 리스크(위험) 때문이다.
채권 수익률 하락은 곧 채권 가격 상승을 의미한다. 결국 시장에서는 고평가된 주가를 고평가된 채권가격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하넷은 주식과 채권의 가격 수준이 지금처럼 높았던 적이 1950년 이후 1998~99년, 1986~87년뿐이었다며, 두 경우 모두 결말이 좋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1990년대 말의 닷컴버블은 2000년 터졌고, 1987년 10월에는 뉴욕증시 대폭락 사태(블랙먼데이)가 일어났다.
하넷은 끝으로 코로나19 백신과 부양정책이 시장을 이전 상태로 되돌릴 것이라는 기대도 깨지기 쉽다고 봤다. 11월 초 기술주 중심으로 나타난 투매를 보면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성장잠재력이 커 주가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주, 특히 기술주는 최근 몇 년간 미국 증시 랠리를 주도했지만, 투자자들이 이젠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가치주 투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하넷은 가치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 밸류에이션에도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