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광풍이 일고 있는 암호화폐에 대해 비관론자들은 내재가치가 없는 자산이라고 평가절하한다. 비트코인이 대표격인데,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얘기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달 암호화폐 가격 상승에 대해 "암호자산은 내재가치가 없다"며 앞으로 가격 변동성이 아주 높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을 지낸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도 거들었다. 그는 지난달 한 콘퍼런스에서 비트코인은 매우 투기적인 자산이며, 가격 변동성이 극도로 높다고 밝혔다.
스티브 한케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최근 트위터에 "이것만 기억하라. 비트코인은 근본적인 가치가 '제로'(0)인 매우 투기적인 자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통화정책 전문가로 외환·상품시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기도 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비트코인이 실제 내재가치까지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를 치는 건 시간 문제"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비트코인 가격이 곧 '0원'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얘기다.
비즈니스블룸버그는 9일(현지시간) 암호화폐의 내재가치가 '제로'라는 비판은 암호화폐 옹호론자들도 상당수 공감하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암호화폐 내재가치 없다" vs '주관가치설'
짐 하퍼 미국기업연구소(AEI) 방문연구원은 지난 8일 AEI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비트코인의 내재가치가 제로라는 한케 교수의 지적에 "그럼 다른 자산의 내재가치는 어떠냐"고 되물었다.
하퍼 연구원은 "무엇이든 근본적이거나 내재적인 가치는 없다"며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상황과 계획에 근거해 가치를 얼마나 둘 지 결정한다. 전체로는 그들이 사회 전반의 가치 있는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하퍼가 비트코인 옹호론의 근거로 삼은 건 '주관가치설'이다. 재화의 가치는 그 효용에 대한 주관적 인식에 따라 결정된고 설명하는 이론이다.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노동이나 자본 등 투입된 비용을 가치의 근거로 삼는 '객관가치설'과 대척점에 있다.
하퍼 연구원은 주관가치설이 경제학뿐 아니라 자유, 진보, 인간애를 비롯한 사회적 가치에도 매우 중요한 통찰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주관적인 가치라는 게 결국 뭘 사고 팔아야 할지 개인들이 결정한 총체라고 설명했다.
◇가치 범위 제각각...비트코인은 '무한대'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을 들어 하퍼의 주장이 한 편은 맞다고 봤다. 그러면서 비트코인과 달리 그 자체로 유용한 내재가치를 가진 것들이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물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다리나, 대두(콩)밭, 신발 같은 것들 말이다.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처럼 실체가 있거나 생산적인 대상에 매기고 있는 가치의 범위가 비트코인보다 훨씬 좁다고 지적했다.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매기는 가치의 범위는 0달러에서 수십만 달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무한하다.
가치를 매길 다른 척도가 없다면, 결국 주관이 가장 중요한 가늠자가 되는 셈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주관성의 극치
윌럼 뷔터 전 씨티그룹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프로젝트신디케이트(PS)에 '슈뢰딩거의 비트코인'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글 제목은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양자역학 사고실험에서 따왔다.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독가스가 나오는 밀폐된 상자 안에 고양이를 넣었다고 가정하고 양자역학 원리를 설명했다.
이 고양이는 살았을까, 죽었을까. 물론 죽었을 게 확실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가 상자를 열어 확인하기 전까지 고양이는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상자를 열기 전에는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의 가능성이 병존하고 있는 셈이다.
블룸버그비즈니스위크는 주관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극적인 변동성..."비트코인 투자 신중해야"
미국 컬럼비아대 방문교수로 있는 뷔터는 비트코인의 내재가치가 제로라는 한케 교수의 비판에 동조했다. 그는 "최근 투기적인 가격 급등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은 내재가치가 없는 자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썼다.
뷔터는 또 비트코인이 금처럼 본질적인 가치를 가진 자산을 배경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달러나 유로 등과 다를 바 없는 명목화폐(fiat currency)지만, 중앙은행이 가치 안정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지적했다.
뷔터는 비트코인의 극적인 가격 변동성이 놀랍지 않다고도 했다. 최근 증시 흐름도 실물경제 흐름과 뚜렷한 인과관계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뷔터는 비트코인이 내재가치는 없지만, 시장가치라면 얼마든지 오르내리고, 제로에 이를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비트코인이 과도한 변동성의 교과서 같은 예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건전한 위험추구 성향과 탄탄한 손실 흡수력이 있는 이들만이 비트코인 투자를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