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인 중국 화웨이가 미·중 기술냉전의 한복판에 섰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인프라인 5G(5세대 이동통신기술) 선점 경쟁에서 화웨이가 중국의 첨병으로서 유례없이 약진하자 미국이 화웨이를 상대로 공세 수위를 높이고 있다. 5G 시대 기술 패권을 중국에 넘길 수 없다는 위기감이 반영돼 있다는 분석이다.
◇美, 화웨이에 전방위 공세..."반도체 공급선 끊은 건 '사망선고'"
미국의 화웨이 공세는 전방위적이다. 기술 탈취, 금융사기, 대이란 제재 위반으로 화웨이를 기소했고 국가안보 위협을 이유로 미국에서 화웨이 통신장비를 퇴출했다. 또 국제적으로 화웨이 보이콧 캠페인을 벌이며 유럽과 아시아 주요 동맹들에 탈(脫)화웨이를 압박하고 있다.
핵심 부품인 반도체 조달 통로도 원천 봉쇄하고 나섰다. 지난해 5월 국가안보 우려를 이유로 화웨이와 계열사 68곳을 거래제한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미국 기술·부품·소프트웨어 활용도가 25% 이상인 제품을 화웨이에 공급할 때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한 게 시작이었다. 이 제재로 인텔과 퀄컴 등 미국 기업들과 화웨이의 거래 통로가 막혔다. 같은 해 8월에는 블랙리스트에 화웨이 계열사 46곳을 추가했다.
올해 5월에는 국적을 불문하고 미국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기업이 화웨이에 제품을 공급하려면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새 제재를 단행했다. 화웨이가 독자 설계한 반도체를 표적으로 삼았다. 화웨이가 자회사 하이실리콘을 통해 설계한 반도체를 세계 최대 반도체 수탁생산업체 대만 TSMC에 맡겨 조달하자 내놓은 조치였다. TSMC는 결국 화웨이에 대한 납품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나아가 미국은 지난 17일 화웨이가 '최종사용자'가 되는 모든 거래에 대해 미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추가 제재를 발표했다. 블랙리스트에 38개 화웨이 계열사도 추가했다. 화웨이가 5월 제재 후 대만 미디어텍 등으로부터 기성품 반도체를 구매하는 우회로를 찾자, 사실상 전 세계 모든 반도체 회사가 화웨이와 거래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화웨이가 제재 빈틈을 파고들어 반도체 조달 우회로를 찾을 때마다 미국은 공급 통로를 원천 봉쇄하는 방식으로 제재를 확대하는 양상이다.
단왕 가베칼리서치 애널리스트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미국의 이번 제재를 두고 "미국 정부가 화웨이에 사망 선고를 내렸다"고 평가하면서 "반도체가 없으면 5G 네트워크 장비와 스마트폰 제조사로서 화웨이의 운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화웨이는 미국의 제재에 대비해 반도체 물량을 상당량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1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반도체 재고가 바닥나면 스마트폰과 기지국 장비 생산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5G가 뭐길래...미·중 기술냉전 본질은 5G 주도권 싸움
미국이 화웨이 때리기의 명분으로 삼는 건 안보 우려다. 미국은 화웨이가 중국 정부의 스파이 노릇을 한다고 보고 있다. 화웨이 장비를 통해 수집된 각종 정보가 중국 정부로 흘러들어 가거나 화웨이 장비가 중국 정부의 사이버 공격에 활용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의 화웨이 때리기 이면에는 5G 시대의 기술과 경제 주도권이 중국에 넘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숨어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5G는 4G(LTE) 통신보다 10~40배 빠르면서 대량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는 차세대 통신망이다.
초저지연성과 초연결성이 특징으로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가상현실(VR) 등 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미래 경제의 핵심 인프라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데이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선 5G가 필수다.
정보통신기술(ICT) 리서치업체인 마켓트앤드마켓츠에 따르면 5G 인프라 시장 규모는 지난해 7억8400만달러에서 2027년 480억달러로 커질 전망이다. 더 중요한 건 5G 선점에 수조 달러의 경제적 이권이 달려있다는 점이다. 5G 영역을 먼저 점령하는 나라가 미래 경제와 기술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은 2017년 1월에 낸 보고서에서 5G가 세계 경제 활동에 얼마나 기여할지 분석했는데, 2035년에 그 규모가 약 12조3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같은 해 전 세계 실질 국내총생산(GDP)의 4.6%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IHS마킷은 또 2035년 글로벌 5G 가치사슬에 따른 총 GDP 규모가 3조5000억달러, 일자리수는 2200만명에 달할 것으로 봤다. 국가별로는 중국, 미국, 일본, 독일, 한국, 프랑스, 영국 등의 순으로 가치사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다.
화웨이는 5G 산업에서 세계 선두를 달리는 회사다. 중국 정부의 막대한 투자를 등에 업고 고속 성장하며 순식간에 시장을 장악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델오로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화웨이는 5G 통신장비 점유율, 5G 핵심 표준 특허, 5G 표준 정립 기여도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으로선 5G 기술 보급과 함께 미국이 전후 수십 년 동안 쥐고 있던 경제 패권이 중국에 넘어갈 것이라는 위기감이 현실화한 셈이다.
삼성전자, 스웨덴의 에릭슨, 핀란드의 노키아도 5G 장비의 주요 플레이어지만 미국의 우방인 데다 경쟁력 면에서 화웨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다. 미국에는 이렇다 할 기업이 없다. 무선 부품과 반도체를 제조하는 퀄컴, 스마트폰 선두주자 애플 등이 전부다. 글로벌 시장에서 5G 통신장비와 스마트폰까지 완벽한 5G 솔루션을 제공하는 화웨이가 미국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화웨이 '난니완 프로젝트'...항일투쟁식 기술자립 박차
화웨이는 기술 자립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구글과 거래가 끊기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에 의존하지 않은 자체 OS인 '하모니'를 출시한 게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는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완전한 기술 자급화를 실현하는 '난니완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난니완이라는 이름은 항일전쟁 기간 산시성 난니완에서 황무지를 개척해 의식주를 자급했던 공산당 부대의 정신을 의미한다. 일본군과 싸웠던 것처럼 미국의 공세에 자력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미·중 기술 신냉전이 조기에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은 자국의 지식재산권이 들어간 기술과 소프트웨어가 중국 첨단산업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고삐를 더 죌 게 뻔하다. 미국의 대중 압박이 강해질수록 중국은 자국 중심의 기술 표준으로 별도의 경제 블록을 구축할 공산이 크다. 나머지 세계는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어려운 선택지를 받아들게 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