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투자자 제레미 그랜덤이 "일방적인 낙관론"을 이유로 미국 증시에 사실상 등을 돌렸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여파로 미국 경제가 사상 최악인데, 증시는 터무니없이 고평가돼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美증시 '순매도' 전환..."주가수준은 상위 10%, 경제는 하위 1%"
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그랜덤이 공동 설립한 미국 자산운용사 GMO는 최근 간판펀드인 '벤치마크프리앨러케이션펀드'의 글로벌 증시 순편입비중(net exposure)을 55%에서 25%로 낮췄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저점 수준이라고 한다.
주식순편입비중은 매수(롱) 포지션과 매도(숏) 포지션의 차이를 말한다. 이번 조정으로 이 펀드의 미국 증시 순편입비중은 3~4%에서 순매도 포지션으로 바뀌었다. 미국 증시에 등을 돌린 셈이다.
벤 인커 GMO 자산배분 책임자는 이날 고객들에게 낸 분기 서한에서 미국 증시에 대한 순매도 포지션 규모가 3억7500억달러쯤 된다고 했다. GMO는 코로나19발 투매가 한창일 때 미국 증시 투자를 늘린 이후 포지션을 축소해왔다고 한다.
그랜덤은 FT와의 회견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리스크(위험)에 대한 존중을 일으켰어야 하는데 정반대가 됐다"고 꼬집었다. 팬데믹 공포가 리스크 회피 심리를 자극하기보다 오히려 리스크 선호 현상을 일으켜 위험자산인 주식에 투자가 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 뉴욕증시 대표지수인 S&P500은 코로나19 사태로 지난 3월 일어난 투매 바람에 저점을 찍은 뒤 40%가량 반등했다. 이로써 지수는 8%만 더 오르면 지난 2월의 사상 최고치를 회복할 수 있게 됐다.
그랜덤은 미국 증시의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주가수익비율(PER)이 역대 상위 10% 수준인데, 미국 경제는 역사상 최악 가운데 10%, 어쩌면 1% 안에 들 정도로 상황이 나쁘다고 지적했다.
◇중앙은행 통화부양에 "일방적 낙관"...인플레 경고도
그는 증시가 경제적 현실과 동떨어져 랠리를 펼치고 있는 게 중앙은행들의 유례없는 경기부양 노력에 따른 일방적인 낙관론 탓이라고 봤다. 그러면서 중앙은행들의 경기부양이 계속되길 바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랜덤은 "분별과 인내가 필요한 때에 시장이 일방적인 낙관론에 빠진 것 같다"며 "시장이 나쁘게 끝날 것이라는 확신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분기서한에서는 "지금처럼 전망이 불확실한 때가 없었다"며, 미국 경제에 대해 "거의 확실한 건 'V'자 회복은 요원해보인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그랜덤은 또 지난 20년간 자신이 인플레이션에 대해 호들갑을 떨지 않은 게 자랑스럽다며, 중앙은행들의 역대 최대 통화부양 공세가 이번에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동안 여러 전문가들이 제기했다가 빗나갔던 인플레이션 경고가 마침내 실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올해 81세인 그랜덤은 증시 비관론자로 시장의 거품 위험을 잘 감지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1989년 일본의 자산거품이 붕괴하기 2년 전에 일본 주식을 처분한 그는 '닷컴버블' 붕괴와 미국 부동산거품 붕괴에 따른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투자로 명성을 높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