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텍사스원유(WTI)의 선물가격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영역에 진입했다. WTI를 팔면 돈을 받는게 아니라 저장비용과 같은 웃돈을 줘야 한다는 얘기다.
저품질의 도로포장용 석유가 현물시장에서 웃돈을 내야 하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저유황 최고급 유종에 속하는 WTI의 선물이 이렇게 추락한 적은 없었다.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원유는 그 어느 자산보다 막대한 매도세에 휩싸였다. 재선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추구하는 에너지 패권이 부메랑으로 되돌아 왔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하지만 이날 마이너스 유가는 만기가 하루 남은 근월물인 5월물에 한정적인 얘기다. 차월물인 6월물은 배럴당 20달러선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시장을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낙관론도 있다.
◇WTI 5월물 -37달러...슈퍼 울트라 콘탱고
우리시간으로 21일 오전 8시 29분 현재 WTI 5월 선물은 간밤 뉴욕전장 대비 34.63달러(92.03%) 오른 배럴당 -3달러를 기록했다. 뉴욕 시간대 거래에서는 300% 넘게 폭락해 배럴당 -37.63달러로 마감됐다. 아시아 시장의 개장을 앞두고 낙폭이 많이 줄었지만 5월물은 여전히 마이너스에 머물렀다.
WTI 선물 대폭락은 기술적으로 보면 만기를 하루 앞둔 5월물에서 다른 선물을 갈아 타는 수요 때문에 벌어졌다. 이른바 콘탱고 현상이다. 콘탱고란 근월물 선물 혹은 현물이 원월물 선물보다 낮아지는 것으로 공급과잉일 때 나타난다. 그러나 이날은 슈퍼 울트라 콘탱고라고 불러도 될 만큼 근월물과 원월물 가격차이가 벌어졌다.
일반적인 시장에서 현물 혹은 근월물과 원월물 사이 가격 차이는 배럴당 40~50센트인데 현재 그 격차는 배럴당 60달러까지 치솟았다. 거래가 더 많은 차월물인 WTI 6월물은 배럴당 20달러선을 지켰다.
◇ 저장공간 2주래 소진
마이너스 유가는 코로나19 위기에 무너진 수요붕괴와 공급과잉때문이다. 넘치는 원유를 담을 저장 공간이 사라지면서 유가가 급락한 것이다.
WTI선물의 실물 인수지점인 오클라호마 쿠싱의 원유재고는 전체 용량의 69%를 잠식했다. 쿠싱재고는 4주 전의 49%에 비해 20%포인트나 늘었다. 쿠싱은 미국 전체의 원유재고 흐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미국에 원유 재고를 쌓을 만한 곳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원유시장 전문 뉴스레터인 쇼크리포트(Schork Report)의 스티븐 쇼크 편집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미국의 원유저장 용량이 2주 안에 소진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에너지 패권 위기
결국 트럼프가 추구한 에너지 패권도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셰일혁명으로 미국에 막대한 원유 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유가 폭락으로 미국 에너지 업계는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석유서비스업체 카나리의 댄 에버하트 최고경영자(CEO)는 "파산의 물결이 에너지 산업에 임박했다"고 말했다.
결국 에너지 업체들의 줄도산은 에너지 패권을 흔들 수 밖에 없고 트럼프 재선 가능성도 낮춘다.
트럼프 대통령은 너무 낮은 유가에 불만을 표하며 중동과 러시아, 남미 등 전통적 산유국들의 대규모 감산 약속을 받아냈다. 코로나19 수요붕괴 속에서 감산 합의 효과는 없었다. 유가는 계속 내려 마이너스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5월 역대급 감산 시작
그러나 원유시장의 상황이 그렇게 암울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일단 6월물은 배럴당 20달러를 웃돌고 있으며 5월부터 2달 동안 전통적 산유국들이 일평균 1000만배럴에 가까운 생산을 줄이기로 합의했다.
어게인캐피탈의 존 킬더프 공동창업자는 "원월물로 갈 수록 가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앞으로 몇 개월 동안 가격이 적정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원유 시추공이 급감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 플러스(+)가 합의한 감산을 이행할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러면서 유럽과 일본에서 이미 마이너스로 내려간 초(初) 저금리의 현금과 원유가 "바닥을 향한 죽음의 질주"라는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킬더프는 덧붙였다. 코로나 대위기에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현금을 살포하는 상황 속의 마이너스 금리 시대에 원유가 더 나은 투자처일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가능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