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수레바퀴[사진=위키피디아]
운명의 수레바퀴[사진=위키피디아]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었다. 나는 왕국이 없다."

로마신화의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Fortuna)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린다. '운명의 수레바퀴'다. 수레바퀴에 올라탄 남자가 하는 말은 인생이 '새옹지마'라는 걸 일깨워준다.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정점에 도달해서는 "내가 왕"이라고 선포한다. 바퀴가 계속 굴러 바닥으로 향할 때도 자신이 왕이었다며 거드름을 피웠지만, 결국 바퀴에서 떨어져 몰락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니스트인 제이슨 츠바이크는 지난 4일 쓴 글에서 '운명의 수레바퀴' 얘기를 통해 최근 미국 증시 랠리를 주도해온 기술주 투자의 위험을 경고했다. 시가총액 세계 1위인 애플을 비롯한 미국 기술 대기업들이 승승장구하며 시장을 지배하고 있지만, 수레바퀴에서 떨어질 날이 투자자들의 예상하는 시점보다 훨씬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엑손모빌 다우지수 퇴출...'터줏대감'의 굴욕

츠바이크는 미국 석유대기업 엑손모빌이 지난달 31일 다우지수에서 퇴출된 게 기술주에 대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3일 기술주가 급락하면서 나스닥지수가 5% 가까이 추락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 애플은 8% 폭락하며 시총 1800억달러(약 214조원)를 잃었다. 하루 시총 손실액으로는 역대 최대다.

엑손모빌은 1928년 10월에 다우지수에 처음 편입돼 지난달 퇴출되기까지 가장 오래 머물렀다. 2011년까지만 해도 지금의 애플처럼 세계에서 시총이 가장 큰 기업이었다. '스탠더드오일'로 불렸던 1912년에도 세계 시총 순위에서 US스틸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 투자운용사 디멘셔널펀드어드바이저스에 따르면 엑손모빌은 193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10년마다 모두 미국 시총 5위 기업 안에 들었다.

◇"아 옛날이여"...시총 1위서 추락한 기업들

시총 선두를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정상에 도달하기는 더 어렵다. 미국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주가리서치센터가 부동산투자신탁(REIT)을 포함해 1925년 12월부터 지난 7월까지 미국에서 보통주를 발행한 2만4979개 종목을 분석한 결과, 95년 동안 한 번, 잠시라도 시총 1위를 차지한 종목은 11개뿐이었다. 문제는 어느 종목이든 힘겹게 시총 선두에 오른 뒤에는 머잖아 시들해지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미국 통신대기업 AT&T는 지난 95년 중 43%에 이르는 기간에 미국 시총 1위 자리를 지켰다. 1930년대 초에는 미국 증시 전체 시총의 8분의 1을 차지했을 정도다. 1960년대만 해도 12분의 1을 거머쥐고 있었지만, 현재 시총 순위는 174위에 불과하다.

IBM은 지난 95년의 20%를 시총 1위로 있었지만, 현재는 55위로 밀려났다. 제너럴일렉트릭(GE)과 엑손모빌은 95년 중 각각 10%나 왕좌를 지켰지만, 현재 시총 순위는 118위, 32위다. 미국 자동차업체 GM은 95년의 6%를 시총 '넘버1'로 시장을 지배했지만, 현재 시총은 15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2009년 파산보호(챕터11) 신청을 할 때 시총 순위는 1629위였다.

시총 1위 왕좌에서 며칠 만에 내려온 기업들도 적지 않다. 한때 필립모리스로 불렸던 담배회사 알트리아그룹은 1991~92년에 걸쳐 34일간 시총 1위를 차지했고, 세계 최대 소매업체 월마트는 1992년 3일 동안 시총 선두를 기록했다.

◇'부메랑' 된 엑손모빌 사상 최대 바이백

츠바이크는 엑손모빌의 몰락은 자처한 측면도 있다고 꼬집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자사주 매입(바이백)에 나선 게 패착이 됐다는 것이다. 바이백은 유통 주식 수를 줄여 주가와 주요 실적지표인 주당순이익(EPS)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하워드 실버블랫 S&P다우존스지수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엑손모빌은 2004년부터 올해까지 전체 보통주의 3분의 1이 넘는 23억주를 사들였다. 바이백에 쓴 돈이 2314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미국 대형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시총(S&P500지수 편입 기업 가운데 27위)을 웃도는 것이다.

츠바이크는 엑손모빌의 바이백에 참여한 투자자들이 보유 주식을 회사에 되팔아 받은 돈으로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시 꾸며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상당한 자금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같은 기술 대기업들의 주식을 사는 데 쓰인 게 확실하다고 봤다. 현재 미국 증시에서 시총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는 종목들이다.

츠바이크는 엑손모빌이 스스로를 쪼그라트렸을 뿐 아니라 다른 종목들을 키워줬다고 지적했다. 애플은 지난 3일 주가 폭락에도 불과하고 여전히 2조달러가 훌쩍 넘는 시총을 뽐내고 있다.

◇"증시도 '운명의 수레바퀴' 역행 못해" 

츠바이크는 엑손모빌의 완만한 쇠락과 미국 대표 기술주들의 충격적인 주가 급락은 기업의 성쇠가 운명의 수레바퀴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많은 투자자들이 적어도 최근까지는 애플, MS, 아마존 같은 오늘날의 거대 기술기업들이 앞으로 수십년간 미국 증시를 지배할 것으로 확신하는 듯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들이 옳았다는 게 증명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1세기에 가까운 증시의 역사는 물론 부와 권력을 포함한 모든 게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고금의 지혜를 부정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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