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한진해운 법정관리를 신청하며 고개를 떨궜다. 선친인 고(故)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로부터 시작돼 40년 간 이어졌던 해운왕 등극의 꿈이 손 안의 모래처럼 흘러내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경영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돈은 1조3000억원이 넘는데 조 회장과 한진그룹이 마련할 수 있는 돈은 1000억원이 고작이다. 그마저도 이사회에서 갑론을박이 지속돼 실제 집행될 지 여부는 미지수다. 정부와 채권단도 추가 자금 지원은 없다고 못 박았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 한 현 시점에서 한진해운을 되살리는 건 '미션 임파서블'이다. 

한때 세계 7위권까지 화려하게 비상했던 한국의 대표 국적 선사가 간판을 내릴 위기까지 내몰린 것은 한진해운 경영진과 금융당국, 채권단 모두의 잘못이 더해진 결과다. 분명한 것은 한진해운의 출범을 비롯한 흥망성쇠에 늘 정부 입김이 작용했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조 회장과 한진그룹의 무한책임을 강조하는 정부의 처사에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이유다. 

◇ 박정희·박근혜 父女와 한진해운…인연일까 악연일까

1966년 베트남전쟁 당시 현지에서 물류사업을 진두지휘하던 조중훈 전 회장은 미국 화물선에서 수십톤짜리 컨테이너가 하역되는 장면을 목격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 전 회장은 이 때부터 해운왕을 꿈꿨다고 회고했다. 해운업 진출을 추진하던 조 회장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8년 정부는 한진그룹에 국영기업 중 적자 규모가 가장 컸던 항공공사 인수를 종용했다. 조 전 회장은 세 번이나 고사했지만 "국적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보는 게 소원"이라는 박 전 대통령의 설득을 뿌리치지 못했다. 

조 전 회장이 항공공사 사명을 대한항공으로 바꾼 뒤 단기간 내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자 박 전 대통령은 1977년 해운사 설립도 권유했다. 그 해 한진해운이 정식 출범했다. 당시 영애이자 퍼스트레이디 역할까지 수행했던 박근혜 대통령도 한진해운과 대한항공의 주요 노선 취항식에 직접 참석하며 관심을 보였다. 

한진해운이 오일쇼크를 딛고 승승장구하던 1987년 전두환 정권 말기에 정부는 한진그룹에 대한선주를 떠넘겼다. 최초의 국영기업이었던 해운공사를 민영화한 기업으로 누적 적자가 7500억원에 달했다. 한진그룹은 정부의 강압에 못 이겨 시가대로 인수했지만 이는 정권 교체 뒤 부실기업 정리 관련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 용선료의 저주, 누구 탓인가 

2002년 오너 일가의 계열분리로 한진해운은 조 전 회장의 삼남인 조수호 회장이 맡았다가 2006년 그가 별세하자 부인인 최은영 회장이 이끌어 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전 세계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위기가 찾아오자 결국 2013년 장남인 조양호 회장이 총대를 메고 한진해운을 끌어안았다.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 물류기업을 일군 선친의 업적을 계승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진해운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간 것은 고가의 용선료(선주로부터 배를 빌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금액)였다. 2000년대 중반 높은 수준의 용선료 계약을 장기로 맺었는데 글로벌 경기침체가 시작되자 이 계약이 독으로 작용한 것이다. 한진그룹은 1조원 이상을 쏟아부으며 버텼지만 빚은 눈덩이처럼 쌓여갔다.

시간을 조금만 앞으로 되돌려보자. 그렇다면 한진해운은 왜 그토록 많은 용선료 계약을 맺어야 했을까. 1998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모든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제한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보유 선박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호황기가 도래하자 해외 선주들의 요구대로 고가의 용선료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해운사들이 신나게 돈을 버는데 한진해운만 뒷짐을 지고 있기는 어려웠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부터 해운사 지원책으로 산업은행이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 차환을 해주고 연장 시 20%는 먼저 갚고 나머지 80%는 1년 내에 갚도록 하는 방안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율이 수년 전 발행했던 금리의 2배 이상인 10~12% 수준이다. 사실상 해운사를 상대로 이자놀이를 한 셈이다. 한진해운을 비롯한 국내 해운사들은 더 어려운 지경으로 몰리게 됐다. 

이쯤되면 한진해운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체가 누구인지 특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적어도 조양호 회장의 사재 출연이나 보유지분 포기만 요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한진의 오랜 인연은 '새드엔딩'으로 끝날 것인가. 조중훈·조양호 부자(父子)의 도전은 이대로 스러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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