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연방준비제도(Fed) 본부[사진=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연방준비제도(Fed) 본부[사진=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가 제로금리 장기화를 예고한 게 신흥시장에 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연준의 초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덕분에 달러 약세 흐름이 유지되면 상대적으로 고수익 매력이 큰 신흥시장으로 글로벌 자금이 쏠릴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신흥국 중앙은행이 받는 금리인상 압력 또한 약해진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경기부양이 절실하기는 신흥시장도 마찬가지인 만큼 중앙은행들의 통화완화 여지가 커지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연준처럼 인플레이션 압력을 용인하면서까지 통화부양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블룸버그는 31일 이런 견해들을 인용해 연준의 정책 전환이 신흥국 중앙은행에 당장은 요긴할 수 있지만, 일시적인 효과에 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적잖은 신흥국이 이미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과 과도한 통화 약세로 고전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라구람 라잔 전 인도 중앙은행 총재는 블룸버그TV에 "연준이 신흥시장에 일부 여지를 벌어줬지만, 그들이(신흥국 중앙은행)이 연준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받은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만한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주 잭슨홀 회의 온라인 연설에서 연준이 '평균물가목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물가상승률이 기존 목표치인 2%를 일시적으로 넘겨도 금리인상을 단행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시장에서는 제로금리 기조가 수년에 걸쳐,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연준은 팬데믹 사태에 맞서 지난 3월 기준금리를 다시 제로로 낮추고 사실상 무제한 양적완화에 돌입했다. 이 여파로 10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다러 약세도 가팔라졌다. 미국의 저금리 기조와 달러 약세는 팬데믹 공포가 촉발한 신흥시장발 자금이탈을 가로 막았고, 궁극적으로 글로벌 자금의 신흥시장 복귀를 부추겼다.

주요 10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블룸버그 달러인덱스가 팬데믹 충격이 한창이던 지난 3월 고점에서 최근까지 10% 떨어지는 동안, 주요 신흥국 증시를 반영하는 MSCI신흥시장지수는 40% 넘게 올랐다. 지수는 지난 25일 지난해 말 수준을 회복하며 올해 상승세로 돌아섰다.

블룸버그달러인덱스 추이[자료=블룸버그]
블룸버그달러인덱스 추이[자료=블룸버그]

연준이 '평균물가목표제'를 도입해 제로금리 장기화를 예고한 만큼 신흥시장의 랠리가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는 달러 약세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라고 거들었다. 주요국과 미국의 무역량을 반영한 무역가중환율 기준으로 달러값이 여전히 2%가량 강세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평균치보다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달러 약세에 힘이 더 실리면 신흥국 통화 가치가 상대적으로 올라 인플레이션 압력이 누그러질 수 있다.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여지를 벌 수 있다.

문제는 신흥국 중앙은행들이 연준이 날린 '비둘기'(통화완화)를 마냥 반길 수 없는 처지라는 점이다. 인도와 터키, 아르헨티나 등 물가상승률이 고공행진하고 있는 나라들이 특히 그렇다. 트레이딩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의 물가상승률은 지난 7월 40.6%에 달했다. 터키는 11.8%(6월), 인도는 6.93%(7월)였다. 

아르헨티나(파랑, 왼쪽)·터키 물가상승률 추이[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아르헨티나(파랑, 왼쪽)·터키 물가상승률 추이[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세 나라에서는 통화 가치도 곤두박질치고 있다. 달러 대비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올 들어 24% 가까이 추락했고, 터키 리라화는 23%, 인도 루피화는 3%가량 떨어졌다.

이런 나라들이 연준을 따라 인플레이션을 용인하며 통화완화 기조를 유지하면 물가상승률이 더 치솟을 수밖에 없다. 통화를 비롯한 현지 자산 가치가 급락하면 외국인 자본의 이탈이 거세질 게 뻔하다.

팬데믹 사태는 통화완화로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벤자민 디오크노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는 통화부양뿐 아니라 재정지원, 의학적 해법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타이 후이 JP모건자산운용 수석 아시아시장전략가는 달러 약세가 약이 되는 나라는 인도, 터키, 아르헨티나 같은 곳이 아니라, 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털)이 탄탄한 나라들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달러 약세는) 국내 구조가 취약한 나라에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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