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집어삼킨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재계도 일대 혼란에 빠졌다. 최순실이 설립을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에 국내 대기업들이 거액을 출연한 것과 관련해 민원 처리 등의 대가성이 있었는지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재계 오너 8명은 지난 6일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기자가 주목한 부분은 재계가 검찰 수사와 청문회 참석 등에 대한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는 한편 내부 지배구조 개편에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지배구조를 바꾸는 작업은 향후 경영권의 향방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만큼 세간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특히 반기업 정서가 강한 국내에서는 대기업의 지배구조 변화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정치권을 비롯해 한국 사회 전체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휘둘리고 있는 현시점을 지배구조 개편의 적기로 판단했을 수 있다.

삼성그룹이 먼저 총대를 멨다. 삼성전자가 지주회사 전환을 공식화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인적분할을 통해 사업법인과 투자법인으로 분리한 뒤 삼성전자 투자법인과 삼성물산을 합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럴 경우 삼성물산 최대주주인 이 부회장(지분율 17.08%)은 삼성전자에 대한 장악력을 자연스럽게 확대할 수 있다. 당초 예상됐던 시나리오지만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안의 국회 통과로 직무정지 상태가 되면서 진행 속도가 빨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대기업들도 줄줄이 지배구조 개편을 앞두고 있다. SK그룹은 이미 (주)SK라는 지주회사를 두고 있지만 추가적인 사업구조 변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주)SK의 손자회사인 SK하이닉스를 자회사로 승격시켜 지주회사와 최태원 회장의 지분법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영권 승계가 시급한 현대차그룹도 조만간 현대모비스를 정점으로 하는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나설 공산이 크다. 현대모비스가 현대차와 기아차 등을 지배하는 구조인데 정의선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이 적은 게 걸림돌이다. 정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글로비스와 현대모비스의 지분 스왑이 거론되는 이유다. 

롯데그룹은 타의에 의해 지주회사 전환을 선언한 상태다. 호텔롯데 등 주요 계열사를 모두 사업법인과 투자법인으로 인적분할하고 각 투자법인들을 합쳐 지주회사를 만드는 단계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현대중공업도 비(非) 조선부문을 6개 기업으로 쪼개는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현대중공업 자사주와 현대오일뱅크 지분을 넘겨받은 현대로보틱스가 지주회사 역할을 맡게 됐다. 조선업 침체로 활로를 찾기 위한 자구책이었지만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전무의 경영권을 공고하게 다지려는 목적도 내포돼 있다. 

현 정국을 감안하면 내년까지는 재계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 어려운 환경이 지속될 수 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특별검사 수사와 헌법재판소 심판, 조기 대선 등이 숨가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수개월 간의 검토 기간을 갖고 이후 지주회사 전환에 나서겠다고 한 것도 이같은 상황을 감안한 조치로 해석된다. 차기 정권이 안정 단계에 접어들 때쯤이면 주요 대기업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도 상당한 수준까지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쉽사리 부정하기 어려워지는 셈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경영권 승계를 위한 꼼수로 읽힐 수 있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지배구조 개편의 중심인 3세 혹은 4세 경영인들의 역량과 자질에 대한 의구심은 여전하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암울한 상황을 감안하면 새로운 오너십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출발선에 서는 게 중요할 수 있다. 비록 혼란한 정국에 기댄 감이 있지만 재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운용의 묘를 발휘할 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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