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원잠' 건조는 국내, '버지니아급'은 필리소선소에서
리스크 줄이고 시장은 확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편
지난달 29일 경주 한·미 정상회담 이후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가 국내외 조선업계에 '핫이슈'로 급부상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장소로 미국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십야드'(필리조선소)를 지목하면서 일부 이견도 엇갈리는 모습이다. '필리조선소에서 한국 해군이 사용할 원자력추진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느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와 업계, 전문가들은 한국 해군이 운용할 원자력추진잠수함을 국내에서 건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특히 필리조선소에서의 건조도 고려해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는 전문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콕 집어서 필리조선소를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의 원자력추진잠수함 사업이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마스가, MASGA)와 연계돼야 한다는 점을 트럼프 대통령이 분명히 한 것이라는 얘기다.
국내 건조를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30년 이상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필리조선소는 잠수함 건조를 위한 인프라가 없다는 문제도 지적한다. 물론 국내 건조가 최상의 시나리오일 수는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건조에 방점을 찍은 만큼 양국 동시 건조가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마스가 펀드 활용과 필리조선소 잠수함 인프라 구축
한·미 관세 협상에서 마스가가 결정적 지렛대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8월(현지시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의 모두 발언에서 한국의 조선업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번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기조연설에서도 미국 조선업 부활의 파트너로 한국의 조선업을 강조하며 필리조선소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과 설비가 필요하다. 준비는 어느 정도 됐다고 하지만 결국 국내 건조를 한다고 해도 추가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어차피 한국 정부는 대미 투자 펀드 중 1500억달러를 마스가에 배정했다. 마스가 펀드를 한국 기업 한화가 보유한 필리조선소에 투자할 수 있다면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를 위한 예산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게 일부 전문가의 시각이다.
반대로 다른 일부 전문가들은 필리조선소의 경우 잠수함 건조 경험은 물론 라이선스가 없고, 관련 기반 시설도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지난달 8월 한화가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한 투자 계획에 따르면 50억달러 투자를 통해 필리조선소의 선박 건조 능력을 연간 20척까지 늘릴 계획이다. 또한 이 자료에는 마스가 펀드를 활용해 12만평 규모의 블록 생산기지를 신설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블록 생산기지는 상선보다는 군용 특수선 생산을 위한 부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지만 확보되면 밀폐된 지상 작업장과 잠수함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지반 공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기술자와 협력사 확보에 핵 연료봉 취급도 가능
한화가 필리조선소를 인수했지만 현재 상태로는 미국 해군이 발주하는 함정 건조 사업 진출에는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다. 아직 미국의 방산업체 지정을 받지 못한 데다, 받는다고 해도 최소 몇 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지목한 필리조선소에서 원자력추진잠수함을 건조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방산 라이선스를 패스트트랙으로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미국 해군 함정 사업 수주를 목표로 하는 필리조선소로서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방산업체 지정 시 미국 정부의 간섭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어차피 한국과 미국 어느 곳에서 건조하든 양국의 엄격한 관리는 수반될 수밖에 없다.
원자력추진잠수함 설계와 건조를 위해서는 전후방 산업에 걸쳐 다수의 전문 인적자원 육성과 유지가 필수적이다. 현재 미국에서 원자력추진잠수함을 건조하고 있는 곳은 두 곳으로 제너럴다이내믹스 일렉트릭보트는 코네티컷에서, 헌팅턴잉걸스 뉴포트뉴스는 버지니아에서 각각 건조하고 있다. 필리조선소는 두 곳의 중간 지점인 필라델피아에 위치해 있다. 기존 미국의 잠수함 공급 여력 보완과 확장 측면에서 가장 유리한 지역이다.
최근 필리조선소를 방문했던 한 인사는 인력 확보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인근 도시와 주 정부 관계자들과 논의해 본 결과, 해당 지역에는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도록 채용 및 교육할 수 있는 충분한 인력 풀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 역시 언론 등의 관련 문의에 "현재 미국 내 조선소에서 근무 중인 숙련된 생산 및 엔지니어링 인력과 최근 퇴직한 전문가들을 영입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면서 "한화오션(042660)이 보유한 숙련된 기술진을 필리조선소에 파견해 현지 인력의 전문성을 육성하고, 한화오션이 축적한 글로벌 공급망과 생산 노하우를 이식함으로써 인력과 공급망의 한계를 단계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필리조선소는 과거 미국 해군 조선소였다. 여전히 조선소 바로 옆에 대규모 미국 해군 연구시설과 행정시설 등이 있다. 미국 내 기존 잠수함 건조 조선소인 일렉트릭 보트와 뉴포트 뉴스의 경우 주거지역과 인접해 있지만 핵 연료봉을 취급한다.
미국은 한국보다 더 철저한 안전 규제와 관리·감독 절차를 보유하고 있다. 철저한 원자력 감독기관의 관리로 안전 문제는 없을 것이란 게 한화의 예상이다.
◇한미 동맹 강화·글로벌 시장 확대·국내 협력사 상생 기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가 강력하다면 한국과 미국이 전략적 협력을 통해 필리조선소에서 버지니아급 원자력추진 잠수함을 건조하는 방법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 문제로 두 나라 간 협상 내용을 정리한 조인트 팩트시트 공표가 늦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전향적인 판단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주장이다.
이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필리조선소를 활용할 경우 한국 기업이 미국에서 첨단 잠수함을 건조하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들은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해 한국에서는 한국형 원자력추진잠수함을 건조하고 필리조선소에서 버지니아급 잠수함 사업을 병행 건조한다면 한국 해군의 원자력추진잠수함 전력 확보를 가속화하는 것은 물론 4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K-방산의 글로벌 경쟁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필리조선소에서 버지니아급 잠수함을 건조하게 된다면, 거기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에 한국의 모듈·블록 기술을 더해 한국형 원자력추진잠수함의 완성도는 높이고 리스크는 낮출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미국내에서 잠수함을 건조하는 두 조선소는 포화 상태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연간 2척의 자국 해군용 잠수함과 AUKUS 동맹용 잠수함 1척 등 총 연간 잠수함 3척 건조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현재는 1척을 건조하는 데도 버거워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목표에 비해 건조 속도가 느린 미국 조선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의 조선업 협력을 필요로 하고 필리조선소를 잠수함 생산 기지로 지목했다는 분석도 있다.
마스가 펀드 투자로 필리조선소에서 미국 버지니아급 잠수함을 수주할 경우 국내에서는 시설, 설계, 자재, 모듈 등 협력사들과의 상생도 기대할 수 있다. 이미 한화오션이 수주한 미국 해군 함정 MRO 사업에는 부산과 경남지역 16개 조선소와 협력업체가 컨소시엄으로 참여 중이다.
필리조선소가 버지니아급 잠수함 건조에 참여할 경우 한국은 글로벌 원자력추진잠수함 산업 생태계에 빠른 편입 가능성도 예상된다. 필리조선소 잠수함 건조 사업이 한국 잠수함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확대하는 시너지 효과도 창출시킬 것이 기대되고 있다.
배충현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