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노조가 요구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는 통상임금에 해당한다. 기아차 측이 주장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대해선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

시한폭탄이 터졌다. 산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던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 1심에서 재판부가 '신의칙'을 불인정한 것이다. 3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는 기아차 생산직 근로자 2만7459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통상임금 미지급금 청구 소송에 대해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기아차 노조는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받지 못한 통상임금 소급분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끌어왔다. 재판부는 노조 측이 요구한 정기상여금과 중식비, 일비 가운데 정기상여금과 중식비는 통상임금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이를 근거로 기아차 측이 2011년 소송을 제기한 근로자들에게 지급할 추가 금액으로 원금 3126억원, 지연이자 1097억원 등 총 4223억원을 인정했다. 노조측이 청구한 1조926억원의 38.7%에 해당한다.

이번 소송이 산업계 전체의 관심 대상이 된 것은 통상임금 소송에서 '신의 성실의 원칙(신의칙)' 인정여부가 걸려서다. 민법 제2조 1항에 따르면 신의칙은 권리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를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는 것으로, 만약 법률 관계 대상자가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뢰를 잃었다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문제는 신의칙 인정 여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나온 판례를 보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나 기업 존립 위험이 예상된다면 신의칙을 인정해왔다.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2010년 유동성 위기 등 부채비율 악화로 2심에서 신의칙을 적용 받았다. 현대중공업도 추가부담액 6300억원이 발생하면 회사 존립이 위태로울 수 있어 사측이 승소했다. 최근 판결이 나온 금호타이어 역시 순손실 폭이 대폭 증가하면서 경영위기에 처해 신의칙 인정을 받았다. 반면 남부발전은 추가부담액이 전년 순이익의 3.5%에 불과하다며 재판부가 신의칙을 부정해 패소했다. 동원금속은 1심에서는 인정 받았지만, 2심에서는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은 아니라며 사측이 패소했다.

이처럼 재판부의 판결은 회사가 경영상 어려움을 명백하게 입증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과가 갈렸다. 

이번 소송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드 여파로 극심한 중국 판매 부진을 겪고 있는 기아차는 이번 소송에서 패소할 경우 적자전환 위기에 놓인다고 호소했다. 기아차의 당기순손실도 비슷한 규모로 커지면, 기아차 지분을 33.88% 가진 현대차도 지분법에 따라 이 적자를 지분 비율만큼 감당해야 한다.

기아차는 이번 패소로 실제 부담해야할 금액이 약 1조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경우 올 3분기 기아차는 영업이익 적자전환을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2008년부터 2015년 사이에 당기순이익을 거뒀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는 "근로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임금을 이제 지급하면서 중대 위협이라고 보는 건 적절치 않다"며 "사측의 신의칙 위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기아차측은 "법원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청구금액 대비 부담액이 일부 감액되긴 했지만 현 경영상황은 판결 금액 자체도 감내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반응이다. 또 "즉시 항소해 법리적 판단을 다시 구하겠다"며 "1심 판결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방안을 강구하겠다"고 전했다.

문제는 향후 이어질 비슷한 소송에 미칠 영향이다. 기아차가 남긴 판례로 인해 산업계 전체에 미칠 노동비용 증가 규모는 20조~30조원대로 추정된다. 이미 수많은 소송이 진행되고 있고 이를 본 다른 사업장에서도 비슷한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2013년 3월 '통상임금 산정 범위 확대 시 경제적 영향 분석' 보고서를 통해 정기상여금뿐 아니라 당시 노동계가 주장한 각종 수당이 모두 통상임금으로 인정될 경우 기업이 부담할 추가 비용 규모를 최대 38조5천509억 원으로 추산한 바 있다. 이는 과거 3년간의 임금 소급분 24조8000억원, 각종 수당(초과근로 수당 등), 간접노동비용(퇴직금 등) 증가분 1년 치 약 8조8000억원, 퇴직급여 충당금 증가분 4조8800억여원을 합한 것이다.

실제로 통상임금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인 35개 기업 중 23개사가 기아차와 마찬가지인 소급적용 관련 소송을 겪고 있다. 나머지 10개 기업은 상여금 및 기타 수당의 고정성 충족 여부를 두고 소송 중이다.

현재 통상임금 관련 소송을 진행 중인 기업은 강원랜드, 기아자동차, 다스, 대동공업, 대유위니아, 대한항공, 두산모트롤BG,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중공업, 만도, 볼보건설기계코리아, 삼성중공업, 아시아나항공, 우리은행, 유한킴벌리, 중소기업은행, 한국GM, 한국남동발전, 한국서부발전, 한전KPS, 한진중공업, 현대위아, 현대다이모스, 현대로템, 현대모비스, 현대미포조선, 현대비앤지스틸, 현대오일뱅크,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현대중공업, 현대케피코, S&T중공업, SK에너지, STX조선해양 등이 있다.

경제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번 통상임금 판결은 대법원이 제시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상급심에서는 보다 심도 있게 고려해 판단해 주기를 기대한다"고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박재근 대한상의 기업환경조사본부장은 "통상임금 소송은 노사 당사자가 합의해온 임금관행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일 뿐 아니라 노사간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며 "향후 노사간 소모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는 통상임금의 개념과 범위를 명확하게 정하는 입법조치를 조속히 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도 "사드 보복, 멕시코 등 후발 경쟁국들의 거센 추격, 한미FTA 개정 가능성 등으로 우리 자동차 산업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금번 판결로 기업들이 예측하지 못한 추가 비용까지 부담하게 되어,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이어 "기업들이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매진할 수 있도록, 향후에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투자애로 등의 요인도 종합적으로 고려해주길 기대한다"며 "과도한 인건비 추가부담 등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세부지침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역시 "기존 노사간 약속을 뒤집은 노조의 주장은 받아들여 주면서, 합의를 신뢰하고 준수한 기업은 일방적인 부담과 손해를 감수하라는 것으로 허탈감을 금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발표했다. 또 "회사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금번 판결로 최대 3조원이 넘는 우발채무를 지게 돼 적자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저작권자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