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3일,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대한민국호에게 치욕의 순간이었다. 이후 2001년 8월 23일까지 총 19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를 면한다. 이 기간은 한국 경제역사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다행히 위기는 빠르게 극복했지만,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다. 외환위기를 자력으로 막기에는 한국의 금융·외환 시장은 당시 너무 취약했다.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이 미국과 일본처럼 기축통화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는 ‘돈’이 부족하면 윤전기를 돌려 추가로 찍어내면 된다. 한국 원화는 아무리 찍어내도 기축통화를 이길 수 없다.

외환위기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지만, 원화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한국 경제가 세계를 주도할 정도로 급성장하기 전까지는 아마도 지금 상황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외환위기 재발 위험을 항상 안고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기축통화국과 통화스와프를 체결하면 외환위기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일본, 중국 등은 이를 외교 수단으로 활용해 한국을 압박했다. 화폐의 힘이 약하면, 국제 관계에서도 약자에 머무른다.

최근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가상통화) 열풍은 한국처럼 기축통화를 가지지 못한 나라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존 세계 금융 질서를 완전히 바꿀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암호화폐가 보편화된다면 미국과 유럽 등 일부 국가나 중앙은행이 세계 금융시장을 주도할 수 없게 된다. 암호화폐는 마음대로 찍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최근 암호화폐를 둘러싼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규제에 초점을 맞추면서, 암호화폐의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일종의 공공장부) 기술 발전을 저해할 위험성이 커졌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암호화폐 거래소 폐지까지도 목표로 한다”는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암호화폐에 대해 비교적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한 IT(정보통신) 대기업 고위 임원은 “한국처럼 기축통화를 갖지 못한 나라가 (암호화폐라는) 파도를 타지 않으면 어쩌나”라며 “IT 선진국으로 잠재력이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아깝다”라고 말했다. 일본 가상화폐사업자협회의 한 임원은 한국의 규제 소식에 “한국의 개발자여 일본으로 오라”고 말했다.

암호화폐가 훗날 기축통화로 자리 잡을지는 물론 미지수다. 당장 눈앞에는 암호화폐 투기 광풍이 불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 것이다. 다만 규제로 인해 모처럼 활성화된 시장과 높아진 국민적 관심을 사장시켜서는 안 된다. 투기는 잡으면서도 블록체인 시장은 키우는 묘수가 절실하다. 다행히 정부가 블록체인 융합기술 개발을 위해 14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예산 낭비 없이 큰 결실을 맺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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