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이상 제조업체 40%, '사내하도급' 활용

임금 근로자 10명 중 3명 이상이 비정규직인 사회. 매년 늘어나는 비정규직 수는 '좋은 일자리', '공정한 사회'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심을 얻기 위해 비정규직 해소를 들먹여왔다.
그리고 '헛발질'을 반복했다. 문재인 정부는 다를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비정규직 고용불안 해소를 넘어 공공부문 비정규직 철폐를 선언했다. 역대 정부 중 가장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며 변화를 예고했다. 그 누구도 풀지 못한 비정규직 문제를 새 정부는 어떻게 해결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편집자 주]
#1) A 자동차 업체의 판매사원으로 근무한 김은환(34세. 가명) 씨는 최근 회사를 그만뒀다. 그는 입사 6년 차 계약직이지만 영업점에서 판매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자 자신을 대하는 분위기가 바뀌었고 결국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다. 김 씨는 자신이 비정규직 노조에 가입하려 하자 회사가 사직을 종용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
#2) B전자의 협력사 비정규직인 이창민(36세. 가명) 씨는 고용불안이 최대의 고민이다. 27세에 전자회사 생산직으로 근무를 시작해 최근 세 번째 회사로 이직한 그는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감에 지쳐간다고 호소했다. 첫 회사는 원청사가 거래를 끊으면서 폐업했고 두 번째는 일감이 급격히 줄면서 해고를 당했다.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도 좋지만, 무분별한 해고를 못 하도록 제도적 장치부터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3) C제철 협력사 비정규직인 박철한(42세. 가명) 씨는 기업이 온갖 궃은일은 비정규직에게 맡기면서 임금부터 처우까지 모든 면에서 차별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동료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과도한 근무를 한 것이 진짜 원인이었다고 분노했다. 그는 기업주 처벌법 등 책임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며 정부가 나서서 사회를 바꿔 달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비정규직 철폐 움직임에 자동차·조선·철강 등 민간 제조업체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기간제근로자, 사내하도급 비중이 대기업 평균을 웃도는 만큼 정규직 전환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또 비정규직 노조의 활동이 활발한 기업들은 처우 개선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이들과 기존 노조 간 갈등도 우려하고 있다.
2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300명 이상 제조업체의 40%가 사내하도급을 활용하고 있다. 하청에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산업구조가 팽배한 것이다.
노동집약 업종인 자동차 업계는 경영환경이 좋지 못한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전면 정규직화는 기업의 부담이 크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인 기간제 근로자 비중은 높지 않지만, 1차·2차로 이어지는 협력사가 많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경우 기간제 근로자는 총 6만6806명 중 2166명뿐이다. 기아차 역시 3만4007명 중 240명이 이에 속한다. 반면 현대차그룹에 속한 협력사 수는 4000여개에 이른다. 1차·2차 협력사의 경우 비정규직 근로자 채용 비중이 높다. 현장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불법파견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 간 갈등이 심화할 우려도 있다. 지난달 금속노조 기아차 지부는 2008년 통합 이후 9년 만에 사내하청 조합원들을 분리시키는 안건을 통과시켰다가 철회한 바 있다. 현대차 지부는 사내하청 노조와 통합을 추진하고 있지만 조합원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고 있다.
정규직 전환을 두고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당장 비정규직 철폐는 공공부문에 한해 이뤄지는 것이고 민간 기업에 대한 지원방안 등은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다"며 "인건비 부담을 고려하면 덮어놓고 정규직 전환을 시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 역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노동 유연성과 기업 경쟁력 등도 중요하다"며 "정부가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 풀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업계는 하도급 근로자가 전체 근로자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해 정규직 전환이 현실화될 경우 타격이 예상된다.
조선 3사(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가 직접고용한 비정규직(기간제 근로자)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4.97%다. 10대 기업 평균(2.46%)을 웃도는 수치다. 여기에 수주산업 특성상 탄력적으로 인력을 운용하다 보니 수치로 잡히지 않는 하청업체 활용도가 높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 중국의 추격이 심각한 상황에서 인건비 증가는 수주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아직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현장 인력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는 것은 힘들 것"이라고 전했다.
한 하청업체 관계자는 "프로젝트에 맞춰 유동적으로 움직이다 보니 인력의 90%가량이 하청업체 근로자로 꾸려질 때도 있다"며 "고용불안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LG전자 등 전자업계는 비정규직 비율이 낮아 큰 타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3월 기준 삼성전자는 비정규직 비율이 0.7%, LG전자는 1.3% 수준에 불과하다. SK하이닉스와 LG디스플레이도 각각 0.4%, 0.5%다.
다만 이는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 수일 뿐이다. 전자업계 역시 수많은 협력사로 이뤄져 있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바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 관계자는 "비정규직 대부분은 정규직의 고임금과 높은 수준의 고용보장을 감당하기 어려운 중소기업이 쓰고 있다"며 "법·제도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의 경영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또 "노-노 갈등을 막기 위해 정규직의 고임금, 과보호 문제부터 풀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