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지난해 2월 17일 특검팀에 구속된 지 353일 만에 풀려났다. / 사진제공: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 주변에 간신배가 많아 어렵게 됐는데, (이재용 부회장도) 똑같은 것 같다. 쓴소리 할 수 있는 분들을 쓰고 미래전략실은 해체해야 한다. 어떻게 하겠나."

"미래전략실에 관한 많은 의혹과 부정적인 시각을 느꼈다. 국민과 의원 여러분에게 부정적 인식이 있다면 없애겠다."

지난 2016년 12월 6일 열린 이른바 '최순실 청문회' 당시 이종구 새누리당 의원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간의 대화 내용이다.

이듬해 2월 28일 삼성은 실제로 미래전략실(미전실)을 없앴다. 고(故) 이병철 창업주 시절 비서실로 출발한 그룹 컨트롤타워가 58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삼성의 미전실 해체 발표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법정 구속된 지 열흘 만에 나왔다.

아울러 사실상의 그룹 총수가 영어의 몸이 됐으니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별로 자율경영 체제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까지 삼성의 실험이 시작됐다며 주목했다. 미전실을 이끌던 최지성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은 사임한 뒤 1심 판결 내용에 따라 차례로 구치소에 수감됐다.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삼성물산을 3대 축으로 삼아 각 계열사들은 각개약진에 나섰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손에 쥔 성적표는 어떨까.

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240조원, 영업이익 53조원이라는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맏형이 힘을 내자 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 동생뻘 계열사들의 실적도 반등했다.

금융사업의 두 기둥인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실적은 엇갈렸다. 금융회사의 가장 중요한 실적 지표인 당기순이익 기준으로 생명은 40% 가까이 감소했지만 화재는 10% 이상 늘었다. 이같은 기조는 최근 수년간 이어져온 터라 특별한 건 없다.

제일모직과의 합병 전까지만 해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삼성물산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전년대비 5배 이상 증가한 8800억원으로 집계됐다. 특히 합병 전 역성장을 거듭하던 건설부문이 전체 영업이익의 60% 정도를 책임졌다.

삼성은 건설이 사양 산업이라며 물산의 건설부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합병이 필요하다고 강변해 왔다. 어떤 마법을 부렸기에 이같은 반전 스토리가 가능했는지 묻고 싶은 대목이다.

계열사별로 다소 간의 희비 쌍곡선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룹 전체적으로는 불안정한 경영 상황 속에서도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럼에도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은 공치사에 인색했다. 자율경영 체제가 도래한 만큼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야 연임 등에 도움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미전실 해체 직후부터 '이재용 부회장이 옥중 경영을 하고 있다', '삼성이 무늬만 자율경영을 하고 있다' 등의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고 지난해 말 이는 사실로 확인됐다.

삼성이 11월 초 인사와 조직개편을 통해 '사업지원 태스크포스(TF)' 신설과 이 부회장의 최측근인 정현호 사장의 복귀를 알린 것이다.

정 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지원 TF는 과거 미전실의 빈자리를 대체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 다른 측근인 이상훈 사장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으로 삼은 것은 전자 내 이 부회장의 영향력을 줄이지 않겠다는 신호로 해석됐다.

이 부회장의 2심 판결이 나오기 5일 전인 지난달 31일에는 초대형 사건이 터졌다. 삼성전자가 50대 1 액면분할을 결정한 것이다. '황제주' 꼬리표를 떼고 소액주주들의 더 많은 지지를 받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고 지분을 분산시켜 특정 세력에 의한 경영권 공격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전략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긍정적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될 만한 재료다. 그리고 대망의 2월 5일. 이 부회장은 2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돼 풀려 나왔다.

액면분할 결정은 마치 자신의 재판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에 이뤄졌다. 전언에 따르면 적어도 재판 실무를 맡고 있던 법무법인 태평양 소속 변호사들과 삼성 법무팀은 석방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이 석방된 지 이틀 후인 7일 삼성은 3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공장을 추가로 짓기로 확정했다.

그동안 미뤄졌던 금융 계열사 CEO 인선 작업도 재개됐다. 삼성생명이 8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개최하며 포문을 연다.

자율경영 체제에서 언감생심이던 대규모 투자와 수뇌부 인사 계획이 차례로 발표되고 있다. 1년가량 이어져 온 삼성의 자율경영은 이 부회장의 복귀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이 부회장 역시 수감 생활을 통해 평소의 가치관과 경영을 대하는 인식 등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이제 삼성은 이 부회장의 수감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다른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방향성은 뭘까. 적어도 '주주들과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아 떳떳하게 경영하고 싶다'는 이 부회장의 입버릇과 궤를 같이 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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