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오디오 기업 하만(Harman)을 80억 달러(9조3800억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인수합병(M&A) 사례 중 역대 최대 규모다.

기업 간의 대형 M&A가 성사되려면 금융자문사의 활약이 필수적이다. 기회를 잡은 곳은 미국 투자은행(IB)인 에버코어(Evercore).

에버코어는 이 한 건의 M&A 거래로 1400억원 이상의 자문료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영업비용 지출이 거의 없는 순이익에 가까운 금액이다.

삼성전자는 하만 인수를 추진하면서 금융자문을 해줄 파트너를 물색했는데 국내 금융회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국내 최대 기업의 최대 규모 M&A 거래에서 철저히 소외된 것이다.

흔치 않은 경험을 쌓으면서 글로벌 시장에 이름을 알리고 천문학적인 수익까지 거둘 수 있는 '일석삼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친 국내 금융회사들의 반응은 더욱 기가 막히다.

한 대형 증권사 임원은 "미국 금융회사가 자문 거래를 따낸 게 천만다행"이라며 "국내 경쟁사에 빼앗겼으면 후폭풍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은행계 IB 관계자는 "사실 국내에 골드만삭스나 JP모건처럼 경쟁력을 갖춘 금융회사가 없는 게 사실 아니냐"며 "국내 금융회사가 품기에는 (M&A 거래의) 덩치가 너무 컸다"고 자위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전략이 발표된 지 14년, 한국형 골드만삭스를 배출하겠다며 2009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에 나선 지 8년이 지난 한국 금융산업의 현주소다.

대출이자와 예금이자 간의 격차를 챙기는 예대마진 영업에 주력하는 은행, 개미(소액 투자자)들로부터 거래수수료를 따먹는 브로커리지 영업에 혈안이 된 증권사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명목으로 지난 십수년 간 추진해왔던 금융산업 혁신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애초에 시도조차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등 두 차례의 고비를 넘기며 금융권을 향한 규제의 문턱은 더욱 높아지고 공고해졌다.

그 결과 지난해 기준 서울의 금융중심지 경쟁력 순위는 24위로 아시아 경쟁 도시인 싱가포르(3위)나 홍콩(4위), 도쿄(5위) 등에 크게 뒤지고 있다. 서울은 전년보다 9계단 추락했다. 뒤늦게 금융산업 육성에 나선 중국의 상하이(13위), 베이징(16위), 선전(22위) 등에도 밀리는 처지다.

한국 경제가 성숙 단계에 진입하고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차, LG전자, SK하이닉스, 포스코 등 주요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후방지원 역할을 수행하는 금융시장의 선진화가 시급한 상황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이 제조기업과 발맞춰 글로벌 플레이어로 뛸 수 있도록 금융산업을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려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하지만 이같은 기대를 품고 맞이한 문재인 정부의 초반 행보는 불안하다. 현 정부의 정책 방향을 실물경제에서 실현할 주요 보직 인선을 지켜보면 금융산업 육성 의지를 읽기가 쉽지 않다.

김조원 전 감사원 사무총장의 금융감독원장 내정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을 지낸 뒤 감사원 2인자 자리까지 올랐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 관련 전문성이 결여된 감사원 출신 인사를 금융권 조사·감독을 진두지휘할 수장으로 앉히려는 현 정부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 전문가들은 금감원이 고압적인 자세로 잘못을 찾아내 징벌하는 데서 금융시장 발전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으로 역할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 전 사무총장은 이같은 요구에 역행하는 인사라는 게 중론이다.

금감원 노조가 김 전 사무총장 내정설에 환영의 뜻을 내비친 것은 정권 실세가 오는 게 금융위원회와 기싸움을 펼치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직 이기주의와 함께 권력을 등에 업고 금융권을 상대로 눈치보지 않고 칼을 휘두르겠다는 복합적 의미가 담긴 행태다.

부실기업의 퇴출과 회생을 위한 옥석 가리기를 담당할 산업은행장과 수출입은행장 하마평에 오르는 인사들도 불안하다. 신임 산업은행장으로 거론되는 이동걸 동국대 초빙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 금융위 부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그는 한국개발연구원과 한국금연구원에서 금융시장 구조를 연구한 학자다.

빚을 탕감하는 대신 지분을 받는 출자전환으로 수십개 계열사를 거느리게 된 산업은행은 지분 보유 기업의 민영화와 부실기업 구조조정이 시급하다. 구조조정이 국가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쪽으로 이뤄지려면 각 산업의 특성과 업황을 읽을 눈이 필요하다. 단순히 손실을 피하겠다는 논리로만 접근하면 한진해운 공중분해와 같은 파행적 결과가 재현될 수 있다. 

수출입은행장 후보에 이름을 올린 은성수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국제금융 업무에 밝은 정통 관료다. 전문성 문제는 차치하고 KIC 사장 임기가 상당히 남아 당장 낙하산 인사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친문(親文) 인사로 분류된다.

민간 영역임에도 인사철마다 정권의 입김에 휘둘려 온 은행권의 관행 역시 지속될 공산이 커보인다. 국민연금이 대주주인 KB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 BNK금융지주 등은 벌써부터 이런저런 구설에 오르고 있다.

금융산업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한 범정부 차원의 화끈한 지원은 여전히 요원한 일일까. 문재인 정부의 발상 전환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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