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타는 건 알겠는데 급할수록 돌아가야죠"

지난 14일 청와대가 박근혜 정부 시절 민정수석실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들을 대거 공개한 뒤 한 법조인이 내뱉은 탄식이다.

청와대는 해당 문서에 삼성의 경영권 승계 국면 활용 방안, 문화체육관광부 간부급 공직자 검증, 전교조 견제 시도, 우익단체 지원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고 밝혔다.

언뜻 봐도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된 내용으로 이해된다. 청와대는 이 문서 사본을 국정농단 수사를 주도했던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제출했다.

공개 시점도 묘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일각의 우려를 뒤로 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날이었다.

현직 장관급 인사가 재벌 총수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는 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김 위원장은 "시민의 의무"라며 일축했다. 경제검찰의 수장이라는 점에서, 또 청와대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지난 2월 말 기소된 이 부회장의 구속기간 만료일은 다음달 27일. 이를 감안하면 1심 선고기일은 다음달 중순으로 예상된다. 박영수 특별검사가 "세기의 재판"이 될 것이라고 평가한 이 부회장의 유죄 여부가 한 달 남짓 후면 결정된다는 의미다.

판세는 여전히 모호하다. 최근 문형표 전 문체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하도록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가성 거래를 의심할 만한 핵심 사안에 대해 법원이 유죄를 인정한 것이다. 특검이 우위를 점한 것으로 볼 만한 근거다.

하지만 해당 재판부는 더 윗선의 지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합병 과정의 부당함은 인정받았지만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에 도움을 받을 목적으로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돈을 건넸다는 혐의는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삼성 특검'이라는 비판까지 감수하며 이 부회장을 구속기소 한 특검은 무조건 유죄를 이끌어 내야 한다. 자칫 무죄 판결이 나오거나 선고 결과가 국민적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부실 수사라는 오명을 떠안을 수 있다.

특검보다 더 속이 타는 건 청와대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국정농단, 분노한 민심이 표출된 광화문 촛불집회, 헌정사상 첫 대통령 파면, 조기 대선까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부회장의 뇌물죄는 국정농단 사건의 핵심이다. 특검이 이 부회장을 구속기소 하는 것으로 수사의 정점을 찍었다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는 게 청와대의 바람일 것이다. 이 부회장 재판 결과는 박 전 대통령의 재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변수다.

청와대의 조급함을 알았는지 특검과 검찰은 광폭 행보에 나섰다. 최씨 딸 정유라씨를 포섭해 깜짝 증인으로 내세우고 김 위원장을 앞세워 뇌물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정씨로부터 "삼성이 말을 사줬지만 엄마는 네 말처럼 타라"고 했다는 증언을 이끌어냈다. 말 세탁을 삼성이 모를 리 없다는 진술도 나왔다.

김 위원장으로부터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 없이는 삼성 경영권 승계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확보했다. 소기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청와대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작성에 관여했을 성싶은 문서들을 언론에 공개하며 측면 지원했다.

현재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재판을 사실상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은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이다. 특검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칼잡이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발탁했다. 재판 결과에 따라 문 대통령의 연대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재판은 기소한 검찰과 방어해야 할 변호인, 최종 판단을 내릴 재판부만 관여한다. 이 부회장 재판도 예외일 수 없다. 사안의 엄중함을 이유로 다른 요인이 개입된다면 최종 판결의 정당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

설사 이 부회장에 무죄가 선고될지라도 정경유착으로 대표되는 적폐가 청산돼야 한다는 당위성은 바뀌지 않는다. 삼성의 밀실경영에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비판도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쉽사리 꺾이진 않을 것 같다. 청와대가 조급함을 버리고 차분히 재판 결과를 기다려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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