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대선이 보름 앞으로 다가왔다. 대선 후보 간의 네거티브 공세가 범람하는 가운데 주요 대선 공약에 대한 검증 열기도 뜨겁다.

하지만 대선 후보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공약도 있다. 검찰 개혁이다. 지난해 하반기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이후 일련의 진행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정치 검찰의 민낯을 확인했다.

국민 여론을 등에 업은 대선 후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검찰 개혁의 기치를 높이고 있다. 경찰에 영장 청구권을 주는 수사권 조정 등 대부분의 대선 후보들이 동의하는 내용부터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주장하는 검찰총장 직선제까지 화두도 다양하다. 

검찰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기자가 만난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역대 정권이 늘 검찰 개혁을 외쳤지만 제대로 이뤄진 사례는 거의 없다"면서도 "이번에는 어떤 식으로든 메스를 댈 가능성이 높다"고 토로했다.

성난 민심으로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보궐 대선이 치러지는 마당에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해온 검찰이 외풍을 피해가기는 어렵다는 현실적인 진단이다.

기자가 주목한 부분은 수많은 검찰 개혁 어젠다 중 민정수석비서관(이하 민정수석) 제도의 존폐는 쏙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활약(?) 덕분에 민정수석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포함될 정도로 국민적 관심이 쏠린 키워드가 됐다.

민정수석은 국민 여론과 민심 동향을 살피고 공직사회 기강을 유지하며 대통령의 법률 보좌 역할을 하는 청와대 내 감찰 조직의 수장이다. 이 정도는 사전적 의미에 불과하지만 행간을 살펴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이 숨어있다.

민정수석의 핵심 업무는 검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사정당국과 대통령 간의 가교 역할이다. 예컨대 검찰총장이 주요 사건의 수사 상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려면 민정수석을 거쳐야 한다. 민정수석이 어떤 성향의 소유자인지에 따라 사정정국이나 공안정국의 방향성이 결정될 수 있다는 의미다. 

또 민정수석은 차관급 이상 정부 고위 인사들의 인사 검증을 책임진다. 검찰총장이나 국정원장, 국세청장, 감사원장 등도 민정수석의 검증을 통과해야 제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이 휘두를 수 있는 최고 권력인 사정권과 인사권 뒤에는 늘 민정수석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렇다 보니 역대 대통령들도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측근들을 민정수석에 앉히곤 했다. 박정희 정부 때 처음 등장한 민정수석은 정권마다 민원수석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1980년 전두환 정부 이후에는 민정수석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전두환 정부의 첫 민정수석은 이학봉 전 육군 보안사 수사과장이었다. 12·12 사태 당시 군부 수뇌들을 제압하면서 신군부 쿠데타 성공에 기여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다. 이학봉 전 민정수석은 무려 6년 동안이나 자리를 지키며 권력을 휘둘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초대 민정수석으로 평생의 동지였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를 임명했다. 대통령과 민정수석이 어떤 관계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민정수석 제도를 과감하게 폐지했다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부활시켰다. 권좌에 앉은 이상 민정수석을 통한 사정당국 관리와 인사 검증은 피할 수 없는 유혹이었던 셈이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박근혜 정부의 네 번째 민정수석이었지만 재임기간은 1년 9개월로 가장 길었다. 특히 정윤회 문건 유출 파동 직후 민정수석을 맡아 국정농단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지 않았다면 정권 말기까지 함께 하며 역대 두 번째로 긴 재임 기간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장미대선 정국으로 돌아오자. 대선 후보들이 민정수석 폐지를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행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사정권과 인사권을 조율할 민정수석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려면 민정수석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대선을 6개월 이상 앞당기게 만든 국민의 힘을 직접 목도하고도 취임 직후 자신이 휘두를 권도(權刀)의 칼날이 무뎌질까 지레 걱정하는 대선 후보들의 행태에 이질감을 느끼는 건 비단 기자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민정수석은 종종 조선시대 승정원의 우부승지(右副承旨)와 비견되곤 한다. 현재의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는 도승지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는, 동부승지 등 6명의 승지가 있었다. 이 가운데 우부승지는 검찰 기능과 유사한 형방(刑房)을 담당했다.

법 집행을 책임지다 보니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들이 우부승지로 곧잘 등용되곤 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재상 이원익이나 영조에게 직언을 멈추지 않은 탓에 4번의 유배와 복권을 거친 이기경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연산군 때 중상모략을 일삼아 공분을 사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수챗구멍으로 도망가 반정에 참여한 뒤 공신으로 둔갑한 조계형처럼 정반대의 삶을 산 선인(先人)도 있었다.

앞으로 민정수석을 맡을 인물들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겠지만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 염려가 가시지 않는다. 제2의 우병우를 볼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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