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감정의 파고를 넘어, 한중관계의 미래를 위한 성찰
배우 전지현은 한때 중국에서 여신이었다. 한한령이 발동되기 이전인 2013년 '별에서 온 그대'가 한국과 중국에서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는데 그보다 훨씬 전인 2001년 영화 '엽기적인 그녀'가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것이다.
한때 중국에서는 '엽기적인 그녀'를 영화나 비디오 어떤 식으로든 본 사람들이 2억명은 넘을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웃기는 에피소드이지만 중국 공안 당국이 이 영화에서 전지현이 남자친구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중국 여자들이 흉내낸다면서 "중국 여성들의 폭력화를 조장하는 나쁜 영화"라고 성토했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돌기도 했다.
어쨌든 전지현이 모델로 활동한 브랜드 '네파'는 중국 티몰에서 그녀의 광고를 공개한 뒤, 인지 고객 수 17배 증가, 매출 3배 상승이라는 성과를 기록할 정도였다.
이렇게 인기가 올라서 그런지 한때 전지현이 화교라는 소문이 중화권에서 그럴듯하게 퍼졌다. 무엇보다 그녀의 아버지가 왕정처, 어머니가 목창애라는 아주 특이한 성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왕씨는 고려 왕조의 왕씨이니 한국 성이 분명하지만 어머니 성씨가 한국에서는 보기 힘들어 전지현씨가 중국계라는 소문은 아주 구체적으로 떠돌었다.
물론 전지현 본인이 극구 부인하면서 더 이상 그런 소문을 확산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중국인들이 전지현을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 인기를 구가하던 전지현이 최근 방영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북극성' 속 대사 한마디로 중국 네티즌들에게 몰매를 맞고 있다. 유엔대사 출신 대통령 후보 서문주 역을 연기한 전지현은 극 중에서 "중국은 왜 전쟁을 선호할까요. 핵폭탄이 접경지대에 떨어질 수도 있는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해당 대사가 중국의 이미지에 오명을 씌운 것이고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같은 내용은 홍콩 성도일보가 지난 21일 "한국의 여신으로 불리는 전지현이 드라마 속 대사로 중국을 모욕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많은 누리꾼이 전지현이 광고하는 제품들에 대한 불매운동과 악플을 시작하면서 화장품, 시계 광고 게시가 중단됐다"고 보도하면서 국내에도 본격 전해졌다.
극중 대사로 배우에 대한 성토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은 아니다. 만약 극중 대사를 문제삼는다면 '명량'이나 '하얼빈' 등 우리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인 역할 배우들은 설땅이 없어질 것이다.
◇항일영화 '731', '난징사진관' 등의 돌풍에서 읽히는 중국 제일주의의 파급력은
최근 중국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고발한 자오린산(趙林山) 감독의 영화 '731'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새삼 중국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지고 있다.
영화 '731'은 중국 내에서 역사적 피해자 서사를 강화하며 민족적 결속을 자극했고, 이로 인해 외국 콘텐츠에 대한 감정적 경계심이 높아진 상황인데 드라마 '북극성'의 특정 대사가 중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 감정이 반한 여론으로 확산되는 기묘한 형국이 된 것이다.
이는 단순한 콘텐츠 반응을 넘어, 정치·역사·문화가 얽힌 감정의 연쇄 반응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731'은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수익 3억위안(약 585억원)을 돌파, 돌풍을 일으켰는데 중국 전승절 80주년을 맞은 올해 반일감정을 담은 영화가 중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7월에는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다룬 영화 '난징사진관' 역시 개봉 이후 30억위안(약 5883억원)의 흥행을 기록하면서 여름 시즌 중국 최고 흥행작이 되었다.
'난징사진관'은 1937년 난징대학살 당시 한 사진관에 모인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학살현장을 사진에 담아 훗날 전범재판에 증거물로 제출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이다.
'731'의 상영관에는 오성홍기(五星紅旗)를 휘두르는 중국 젊은이들의 모습이 심심치않게 보도되고 있고 '난징사진관'의 상영관에서 눈물을 훔치는 중국 관객들의 모습은 이제 특별한 이슈가 아니라 중국내에서 일상이 되고 있는 풍경이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중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반일영화를 만들어 국내 정치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지만 영화 '731' 등이 특별히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731'은 영화 제목 숫자에 맞춰 지난 7월 31일 개봉 예정이었으나 잔혹한 묘사와 반일 감정 고조 우려로 인해 개봉이 돌연 연기되기도 했다.
예고편 공개 후 생체실험 장면이 너무 직설적이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중국 SNS에서 확산되며, 일부 관객과 단체들이 상영 반대 청원을 제기했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 대한 엄격한 검열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중국 정부가 잔혹한 묘사나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내용 조정을 영화사에 요구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하지만 이 영화 개봉이 반대청원으로 무기 연기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중국 네티즌들이 "영화개봉을 반대하는 청원을 낸 사람들이야말로 친일파들이다"면서 거센 반발을 일으켜 결국 영화는 만주사변 개시일인 9월 18일에 맞춰 개봉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이른바 '국뽕 영화'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배우이자 감독인 우징(吳京)의 '전랑' 시리즈가 그것인데 중국 특수부대 요원이 국경에서 외국 용병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의 '전랑'이 2015년 3월에 개봉되어 크게 성공한 뒤 2017년 7월에는 아프리카 내전 지역에서 중국인을 구출하는 전직 특수부대 요원의 활약을 담은 '전랑2'가 56억위안이라는 역대급 흥행으로 그때까지 흥행 1위를 달리던 주성치(저우싱츠, 周星馳)의 '미인어'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전랑' 시리즈의 대흥행 이후 중국에서는 중국여권만 보이면 외국의 어떤 무장단체나 폭력집단들도 모두 도망간다는 틱톡이 크게 유행을 해서 실재 중국인들이 외국여행시 현지에서 문제가 생기면 중국 여권을 흔드는 것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우리 역사와도 관련된 중국의 대표적인 애국주의 영화로는 '장진호'가 있다. 1950년 겨울, 한국전쟁 중 미군과 중공군이 격돌한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중국 인민지원군 제9병단의 병사들이 혹한 속에서 미군과 싸우는 과정을 그린 영화인데 2021년 개봉해 우리 돈으로 1조1000억원에 상당하는 57억위안의 흥행 실적을 과시해 '전랑2'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는 과거 우리나라 박정희 정권 시절 '국책영화'들처럼 중국 정부의 강력한 후원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중국의 반일, 반미 영화들이 전부 중국 공산당의 작품은 아니다. '731'만 해도 지나친 반일감정을 우려한 중국 정부의 견제 때문에 개봉이 늦춰지기도 했다.
◇'북극성'의 전지현을 비난하는 '샤오펀홍'이나 그칠 줄 모르는 '혐중시위' 사이에서 한중 문화교류의 저변을 넓혀야
어쨌든 요즘 중국의 풍경을 보면 정부 주도의 애국주의 열풍이 아니라 중국 대중의 저변에 깔린 '중국 제일주의' 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샤오펀홍'(小粉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우리 말로는 '작은 분홍'이라는 뜻인데 강한 애국주의 성향을 보이며, 외국의 중국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인터넷 용어이다.
이들은 SNS에서 중국을 비판하는 콘텐츠에 집단적으로 항의하는 일이 다반사로 이뤄지고 있다. 언어 자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원래는 여성 중심의 팬덤 문화에서 유래했지만, 현재는 남녀 모두 포함하는 정치적 애국주의 집단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731'의 개봉으로 반일 열기가 고조되는 등 애국주의 열풍이 중국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일부 대사나 에피소드 때문에 혐한 분위기까지 인터넷을 달궈 중국 내부에서 전반적인 '반외세 분위기'에 한국이 휘말려 들어가는 기이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일부 소수 지지층 사이의 일이기는 하지만 서울시내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반중시위'가 전개되고 이에 대해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반중시위는 깽판치는 일이다"는 발언까지 내놓았다. 여기에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29일부터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무비자 입국을 허용키로 한 것을 두고 "(국가전산망이 마비된 상태에서)앞으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 입국이 대거 유입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국민 불안과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거 '반미·친미', '반일·친일' 등이 우리 정치사에 중요한 이슈를 선점한 것과 마찬가지로 '반중'이냐 '친중'이냐를 놓고 정치권이 가세해 싸움을 일으키는 형국이 된 것이다.
한중 관계가 사드배치와 한한령 발동 이전의 친밀한 관계에서 벗어나 긴장국면에 돌입한 것은 이미 상당 시간 흘렀다.
떄문에 국내 SNS에는 중국을 혐오하는 콘텐츠가 넘쳐나고 중국 역시 "한국인들은 가난해서 수박도 먹지 못한다"는 이른바 '수박론'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수박 콘텐츠'는 중국인들은 수박을 돼지에게 사료로 쓸 정도로 흔한대 한국에서는 재벌들만 먹는 음식이라면서 중국인이 서울 거리에 수박 한통을 들고 나타나면 한국 미인들이 때로 몰려든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이지만 수십만 클릭수를 자랑하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콘텐츠가 중국 내 사이트에 범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서울여행을 다녀오면 서울의 매력에서 빠져나올수 없다는 이른바 '서울병' 콘텐츠도 요즘은 중국 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8월 방한 외국인 통계를 보면 중국인은 전년동기대비 20% 늘어난 62만명에 달할 정도로 한국 관광산업에서 중국인 비중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올해 누적 중국인 입국자 수는 매월 지난해보다 20~30% 많은 수준을 유지해 이미 375만명을 돌파했다. 중국인의 한국 혐오가 대세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난 8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 중 1위를 차지한 중국인은 전년동기대비 36.5 % 늘어난 101만명에 달했다. '731' 이전에 '난징사진관'이라는 항일영화가 초대박 흥행을 할 때이다.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절대적이라면 이 역시 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한국은 중국을, 중국은 한국을 정말로 잘 알고 있을까? 단편적인 이미지, 왜곡된 기억, 편파적인 뉴스가 상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결정짓는다면, 그 관계는 결코 진전될 수 없다. 감정적 파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지만, 그 파고를 넘는 힘은 결국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다.
상황이 이러할진데 정치권마저 가세해 중국과의 관계를 정략적으로 활용하려 든다면 한중관계의 정상화는 더욱 긴 시간을 기다려야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중국인 관광객 무비자 입국이 실행되는 상황에서 중국의 한한령 해제가 차일피일 늦춰지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