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플레인]"유례없는 불확실성"...러시아 원유금수 들여다보니
추가 봉쇄로 1979년 석유파동 유사 공급충격 우려
글로벌 에너지시장이 1970년대 이후 최악의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미국이 8일(현지시간) 원유를 비롯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을 전면 금지하면서다.
시장에서는 무엇보다 이번 조치의 충격과 불확실성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세를 경계하고 있다. 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거듭해 배럴당 200달러 선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번지고 있다. 이날 브렌트유 마감가는 배럴당 127.98달러로 전날보다 3.9% 올랐다.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가 글로벌 에너지시장에 미칠 영향 등과 관련해 짚어봐야 할 내용들을 정리한다.
①금수조치 수위는?..."글로벌시장 퇴출 아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날 행정명령을 통해 러시아산 원유와 석유제품, 석탄, 천연가스의 수입을 즉각 금지했다. 다만 기존 계약분에 대해서는 45일간의 유예기간을 인정했다. 러시아 에너지 산업에 대한 미국 기업의 투자도 막았다.
영국도 보조를 맞췄다.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줄여 연말까지 완전히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캐나다는 이미 비슷한 금지 조치를 발표했지만, 러시아산 원유 수입량은 무시해도 될 정도다.
주목할 건 이번 조치가 이란을 상대로 한 원유 금수 조치처럼 러시안산 원유를 글로벌시장에서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러시아의 해외 판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얘기다. 특히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럽연합(EU)은 이번 금수 조치에 동참하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산 에너지에 더 광범위한 금수 조치를 취하려면 추가 제재가 필요하다며, EU는 물론 러시아산 에너지 최대 구매국인 인도와 중국의 협력이 필요할 것으로 봤다.
②미국에 미칠 영향은?..."정유업계가 문제"
미국은 세계 최대 석유시장이다. 하루 소비량이 2000만배럴에 이른다. 미국이 지난해 수입한 원유와 연료는 하루 850만배럴로, 러시아산이 약 8%를 차지했다.
FT는 미국엔 러시아산 원유보다 석유제품의 손실로 인한 충격이 더 클 것으로 봤다. 미국 정유업체들이 설비를 가동하는 데 쓰는 진공경유 같은 공급연료가 대표적인 러시아산 석유제품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최근 몇 년간 셰일혁명으로 원유 공급을 크게 늘렸지만, 정작 셰일원유는 미국 정유시설의 공급연료로 쓸 수 없다고 한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에너지애스펙츠의 로버트 캠벨 애널리스트는 러시아산 석유제품이 미국의 전체 석유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석유제품 공급 공백은 정유시설 운영에 타격을 줘 미국 휘발유시장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③러시아에 미칠 영향은?..."'구매자 파업' 압력"
이론적으로 러시아는 금수 조치를 취하지 않은 나라의 구매자를 상대로 미국이나 영국에 수출하지 못한 물량을 팔 수 있다. 문제는 '구매자 파업'(buyer’s strike)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에너지기업들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향후 법적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나 평판 리스크를 우려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꺼리고 있다. 한 예로 영국 석유회사 셸은 이날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 등의 구매를 중단하고, 현지 주유소 등도 폐쇄하기로 했다. 지난주 러시아산 원유 구매 결정으로 비판에 직면한 뒤 입장을 바꾼 것이다.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는 글로벌 에너지시장의 '셀프제재'(self-sanctioning) 압력을 더 높일 공산이 크다. 에너지애스펙츠의 캠벨은 러시아가 경유를 비롯한 연료를 매달 선적할 수 없게 되면 정유공장들이 생산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도미노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유제품 수요가 둔화하면 원유 생산량도 줄기 쉽다는 것이다.
④다음엔 무슨 일이?..."추가 제재 vs 보복 '눈덩이 리스크'"
리처드 넵퓨 미국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 선임 연구원은 FT에 미국과 영국의 금수 조치는 그 자체로 영향이 미미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미국 백악관이 러시아산 에너지 등에 대한 제재 수위를 계속 높일 의지를 보여줬다는 점이라고 짚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인 헬리마 크로프트 RBC캐피털마켓 이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인명피해가 계속 늘어나고 있어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추가 제재 요구를 무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거들었다.
그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중국과 인도의 정유사들마저 러시아산 원유 구매 여부를 놓고 비용편익 분석을 하게 될 것이라며, 독일을 비롯한 다른 대규모 수입국들도 곤란한 처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태세다.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는 지난 7일 서방의 제재에 "거울과 같은 결정"을 내릴 권리를 주장하며, 노드스트림1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에 공급하는 천연가스를 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래피디언에너지그룹의 보브 맥널리 대표는 "우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리스크(위험)에 처했다"고 말했다. 대미언 쿠어밸린 골드만삭스 애널리스트도 이번 사태가 어떻게 해결될 것인지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유례없는 수준이라고 했다.
⑤국제유가 얼마나 오를까?..."배럴당 200달러 넘을 것"
국제 원유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가 빠지면 국제유가도 그만큼 오를 수밖에 없다. 시장에서는 국제유가가 적어도 2008년 7월의 사상 최고치(브렌트유 기준 배럴당 147.5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를 싣고 있다. 그간의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배럴당 200달러 선에 이를 수 있다는 전망인 셈이다.
러시아의 노박 부총리는 지난 7일 미국과 유럽이 자국산 원유 수입을 금지하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300달러를 웃돌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최신 보고서에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한 광범위한 봉쇄가 1979년 석유파동과 거의 비슷한 공급충격을 일으킬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국제유가는 잠재적으로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 서방국에 막대한 경제적 고통을 초래한다.
서방뿐 아니라 세계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질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⑥러시아산 원유 대안은?..."여의치 않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번 금수 조치에 앞서 러시아산 원유의 대체물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미국 내 생산 확대를 독려하고,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석유수출국기구)+'를 상대로 로비를 펼쳤다. 전략비축유 방출 카드도 다시 꺼내 들었고, 심지어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 완화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했다.
FT는 그러나 세계 3위 산유국이자, 최대 석유제품 수출국인 러시아가 국제 원유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으로 보면, 러시아산 원유 공급 손실을 신속하게 메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우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1일 2011년 이후 첫 비상비축유 방출에 합의했지만, 방출 규모가 6000만배럴, 한 달간 하루 200만배럴에 불과하다. IEA에 따르면 서방국에 대한 러시아의 원유 수출이 모두 중단되면 하루 400만배럴(전체의 4%)의 부족분이 발생한다.
이란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 완화에 대해서는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다.
RBC캐피털마켓의 크로프트 이사는 OPEC 산유국 가운데 상당한 여유 생산능력을 가진 유일한 나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증산을 설득하려면 바이든 행정부가 먼저 사우디와 관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우디 실세인 모하메드 빈 살만 왕세자는 바이든 대통령과의 통화조차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셰일업계의 증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CNN비즈니스에 따르면 미국 셰일업계는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인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공급난에 원유 생산에 필요한 모래와 파이프도 구하기 어려운 처지라고 한다.
미국 석유회사인 코노코필립스의 라리언 랜스 최고경영자(CEO)는 "지금 당장 뭘 시작해도, 실제 생산은 12~18개월 뒤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⑦궁극적으로는..."청정에너지 전환 속도 내야"
청정에너지 옹호론자들은 이참에 블라디미르 푸틴 같은 이들의 정권을 풍요롭게 하는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드 마키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은 "화석연료 분쟁에 더 이상 휘말리지 않으려면 국내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게 이번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