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중앙은행이 '에너지쇼크'에 눈감아야 하는 이유
우크라사태 '공급충격'에 원유·천연가스 가격 고공행진 美연준·ECB 등 국내 요인에 초점 맞춰 통화정책 펼쳐야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가격이 치솟고 있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 2월 이후 두 배 넘게 올라 역대 최고 수준이고, 국제유가 기준물인 브렌트유 가격은 2013년 만에 처음으로 배럴당 118달러를 웃돌고 있다.
글로벌 에너지 대기업들이 러시아 자산에서 발을 빼고 있고,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수입 제한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국제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JP모건체이스는 러시아산 원유 공급이 완전히 끊기면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 경우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1.6% 줄고,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 더 오를 것이라는 관측이다. 불황 속에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 전부터 고인플레이션에 대응을 별러온 중앙은행들은 셈법이 복잡해졌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가중되고 있는 인플레이션 압력에 맞서야 할지,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잠재적 성장둔화에 대비해야 할지를 놓고 혼란스럽기는 중앙은행들의 행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투자자들도 마찬가지다.
◇ECB 금리인상 실패의 교훈과 오일쇼크 악몽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5일자 최신호에서 중앙은행들이 치솟는 에너지 가격을 무시하고, 국내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과 계속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선진국 중앙은행이라면 에너지를 비롯한 외부의 공급 충격은 무시해야 한다는 게 통설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사태처럼 전쟁 등에 따른 외부 공급 충격에서 비롯된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으로 보통 단기간에 해소된다는 게 이유다.
유럽중앙은행(ECB)은 2008년과 2011년 이런 경험칙을 무시하고 에너지 가격 급등을 이유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다가 낭패를 봤다. 2008년에는 금리인상 이후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져 글로벌 금융위기 수렁에 더 깊이 빠졌고, 2011년에는 유럽 재정위기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 유로존은 두 경우 모두 심각한 침체를 겪었고, ECB는 기준금리를 다시 급격히 낮춰야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다만 주요국에서 인플레이션이 전부터 고조되고 있는 상황인 만큼 우크라이나 사태가 1970년대의 '오일쇼크' 재현 우려를 낳을 만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오일쇼크는 1973년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욤키푸르 전쟁)에 따른 원유금수 조치 탓으로 주요국의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다.
문제는 에너지 가격이 고공행진한다고 해서 중앙은행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는 점이다. 물가상승세를 억누르겠다며 기준금리를 높이면 경기둔화를 일으킬 공산은 크지만, 정작 에너지 가격을 낮추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에너지 가격을 띄어 올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나마 다행인 건 시장의 내년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이미 상당히 높고, 장기전망은 꽤 안정적이라는 사실이라고 짚었다.
중앙은행들이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경기둔화를 걱정해 통화완화 기조를 유지할 수도 있는데, 이 역시 실수가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와 1970년대 '대인플레이션'(Great Inflation)을 겪으며 이미 저지른 실수라며, 공급이 불안할 때 과도한 경기부양은 경기과열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임금·근원인플레이션 주목...'양적긴축'은 두고봐야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물가압력에 레이저처럼 집중하는 게 최선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임금상승세와 식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인플레이션을 근거로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1월까지 1년간 임금이 5.7% 오르고,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는 5.2% 뛰었다. 근원 PCE물가지수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가장 선호하는 물가지표다.
이코노미스트는 임금과 근원물가 상승세가 이 정도면 연준이 올해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게 마땅하다고 봤다. 그러면서 에너지쇼크가 오히려 미국 셰일업계의 투자를 부추겨 미국 경제 성장세를 북돋울 것으로 기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유로존의 경우 근원인플레이션이 2.7%로 너무 높지만, 임금상승세가 더디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노동시장이 약해지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사태 이전에 예상했던 속도로 올해 금리인상에 나서는 게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다만 중앙은행들이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 파장에 대응할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양적긴축(QT) 속도나 규모를 줄여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떠받쳐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양적긴축은 중앙은행이 양적완화(자산매입)로 늘린 장부상 자산을 줄이는 걸 말한다.
연준은 역외 달러 조달 환경이 빠듯해지면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에게서 달러 공급을 요청받을 수 있고, 유럽중앙은행(ECB)은 역내에서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