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스플레인]인플레이션 시대, '가치주'가 빛나는 이유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는 실물자산이 각광을 받기 마련이다. 물가가 고공행진하고 있는 요즘 투자자들이 금이나 원유, 부동산 등에 몰리고 있는 이유다. 최근에는 암호화폐 비트코인도 인플레이션 헤지(위험회피) 투자처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
반면 주식은 인플레이션 시대에 피해야 할 투자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경험 탓이 크다. 미국이 '대인플레이션'을 겪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 사이 뉴욕증시는 정체돼 사실상 손실을 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7일 평범한 투자자들에게는 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치주가 인플레이션 시대에 최상의 도피처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미국 증시에서 가치주가 연초 잠깐을 제외하고는 고평가된 성장주에 밀리고 있지만, 가치주의 유행이 잠시 미뤄진 것인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미국 증시 가치주를 대표하는 러셀3000가치주지수는 지난 5년간 80% 올랐지만, 러셀3000성장주지수는 같은 기간 100%포인트 더 뛰었다. 대표적인 성장주인 기술주가 랠리를 주도했다.
◇실물자산에 가격결정력까지
WSJ는 과거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을 때는 가치주가 성장주를 압도했다고 지적했다. 가치주로 꼽히는 소비재, 에너지, 금융업종 기업들은 실물자산을 대거 보유하고 있는 데다 가격 결정력도 크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쉽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은 이들의 부채 상환 부담까지 덜어준다.
1930년대, 1990년대, 2010년대 등 저인플레이션이나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가 되는 디플레이션이 일어난 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상당히 높았던 194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와 반대로 성장주가 가치주를 능가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번 인플레이션이 수요 폭발에 따른 공급난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성장주 우세가 한동안 더 이어질 수 있지만,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기업들의 가격인상이 잇따르고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거세지면 인플레이션 위협은 더 거세질 게 뻔하다.
미디어 리서치 사이트 팩티바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26일까지 미디어(영어 종이매체 기준)에서 '인플레이션'을 언급한 횟수는 7만4500건으로 월간 기준으로 적어도 10년 만에 최대를 기록했다.
전기자동차나 신약,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들(성장주)도 가격을 인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본격화하면 주가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이들 기업의 주식은 투자 매력을 잃기 쉽다. 인플레이션 시기에는 금리가 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싼 주식에 돈을 묶어둘 게 아니라 굴리는 게 더 이득이 된다.
◇고평가 된 증시는 '함정'
미국 자산운용사 GMO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인플레이션 헤지 전략에는 모두 결함이 있다고 짚었다. GMO는 특히 미국 물가연동국채(TIPS), 산업 원자재(상품) 등이 하나같이 비싸지고 있다는 걸 문제 삼았다.
GMO 또 금이나 비트코인은 내재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최선의 인플레이션 방어 전략은 저렴한 주식이라는 형태의 가치저장 수단에 베팅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가치주가 TIPS나 상품에 비해 저렴한 가격에 들 수 있는 인플레이션 보험이라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에 맞선 가치주 투자로 기대할 수 있는 게 그저 '덜 나쁜' 성과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주가 수준이 전반적으로 매우 높기 때문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가 고안한 경기조정 주가수익비율(CAPE)로 본 미국 증시 주가 수준은 1980년대 한 자릿수에서 최근 39배로 높아졌다. 닷컴버블 붕괴 이후 최고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