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공급대란]공급망 곳곳서 '병목'...'퍼펙트스톰' 되나?
반도체서 전방위 확산...공급난 장기화 스태그플레이션 '비상'
글로벌 공급망 차질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타격을 입은 생산라인과 물류망이 경기회복세에 따라 폭증한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다. 반도체 부족 사태 정도로만 보였던 공급대란이 이젠 산업 전방위로 번지고 있는 모양새다.
◇공급대란, 반도체서 전방위로...팬데믹 장기화 탓
사실 반도체 공급난만 봐도 파급력이 엄청나다. 지난 1월부터 차량용 반도체 부족 사태가 불거지면서 주요 자동차업체들이 생산차질을 빚고 있다. 반도체 공급난은 △폭발적 수요를 예상 못한 기업의 수급관리 부족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 차질 △미·중 반도체 제재·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문제는 공급망 차질이 반도체 부문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한 예로 미국 패스트푸드업체인 맥도날드는 우유 확보가 어려워 최근 20일 동안 영국 전 지점 메뉴에서 밀크쉐이크를 뺐다. 베트남은 새우 생산량이 팬데믹 사태 이전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이탈리아와 브라질에서는 각각 토마토 수확, 원두 생산이 큰 폭 줄었다.
제조∙소매∙서비스업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영국의 슈퍼마켓 체인들은 물품 운송에 차질을 빚고 있고, 유럽 가전∙가구업체들도 목재∙철강 등의 소재 부족, 수입 지연에 따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사태 장기화를 공급망 혼란의 주원인으로 본다. 여기서 파생된 문제가 한둘 아니다. 우선 팬데믹 사태 초반 매출 감소로 기업들은 재고를 대폭 줄였는데, 경제 재개 이후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가기엔 생산라인 정상화 속도가 너무 더뎠다.
인력난도 더해졌다. 팬데믹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현장 근로자들의 이탈이 잇따른 가운데 국가 간 인력이동 역시 제한됐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에서 팬데믹 사태로 사라진 일자리는 1억4400만개에 이른다. 농업(-27%), 도소매(-15%), 제조(-14%), 건설(-8%), 운수(-6%) 부문에서 특히 인력 손실이 컸다.
해운∙철도∙트럭 부문의 인력 부족은 운송 차질을 일으켰고, 궁극적으로 물류망 전체를 뒤흔들었다. 생산 지연에 운송 지연까지 더해지면서 공급대란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국∙영국∙독일에서만 각각 10만명 안팎의 운송기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는 해상 대기 컨테이너선이 평소 1~2척에서 55척으로 늘었다.
이밖에 팬데믹 사태가 한창일 때 주요국이 취한 수출 제한 조치, 미·중 갈등에 따른 수·출입 차질, 영국의 유럽연합(EU) 이탈, 이른바 브렉시트 이후 영국∙EU 간 교류 차질 등도 공급난을 부채질했다. 기후변화 여파로 세계 곳곳에서 늘어난 자연재해도 공급망 차질의 한 배경이 됐다.
◇지표로 본 공급난...발틱운임지수 1년 새 3.3%↑
세계적인 공급망 차질은 여러 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EU 제조업계에서 원료∙장비 부족사태에 직면한 업체들의 비중은 최근 역대 최고로 40%를 웃돌고 있다. 지난 수십년간 10% 미만이었던 데 비하면 심각한 수준이다. 산업별로는 자동차가 60%, 기계·컴퓨터·고무·전자장비 등이 50%로 높은 편이다. 나라별로는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을 비롯해 동유럽, 북유럽 국가들이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처지라고 한다.
글로벌 운송비용도 치솟고 있다. 영국 해운컨설팅업체 드류리(Drewry)에 따르면 중국 상하이에서 유럽(네덜란드 로테르담), 미국(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컨테이너 운송비용은 1년 전보다 각각 7배, 3배 올랐다. 전 세계 평균치는 4배 상승했다.
해운 시황 대표 가늠자인 발틱운임지수(BDI·Baltic Dry Index)도 1년 새 3.3배 올랐다.
주요국 항만의 적체도 심각하다. 태평양 지역 항구의 하역 지체기간은 보통 사흘이지만, 지난 5월에는 8일까지 늘었다. 대서양 지역 항구는 최대 2주를 넘기는 경우도 있다.
경제지표도 공급망 차질을 신호하고 있다. 글로벌 제조업지수에서 8월 공급자인도기간지수(delivery times Index)는 30대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물류 지체가 그만큼 심하다는 의미다. 유로존 주문∙생산격차는 역대 최고 수준으로 생산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주요국 도매물가와 소매물가도 상승 압력을 받고 있다.
◇공급대란 장기화...스태그플레이션 경고등
전문가들은 글로벌 공급난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 델타변이 확산 등 팬데믹 사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산업별 인력 충원 △국제 물류난 해소 △기업들의 재고확충 등을 단기간에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공급난 장기화는 세계경제 회복을 지연시키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지속적으로 높이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불황 속에 물가가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경고가 잇따르고 있는 이유다. 국제유가와 식품 물가는 최근 1년 새 각각 85%, 33% 올랐다.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 중앙은행들의 통화정책도 꼬이기 쉽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주요국 중앙은행들은 팬데믹발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한 통화부양책을 거둬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성장둔화 우려가 커지면 통화긴축에 나서기 어렵다.
글로벌 공급난이 당장 해소되도 문제는 남는다. 학습효과로 주요국이 보호주의 성향을 강화하면 팬데믹 사태로 주춤해진 세계화가 더 후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글로벌 공급대란이 연말 쇼핑시즌을 맞아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