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허리케인 겪고도 기후변화 못 믿는 미국인들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즈에서 은퇴생활 중인 브루스(70)씨는 지난달 현지 지역 매체인 타임스피커윤(Times-Picayune)에 구독 취소 이메일을 보냈다. 이 매체의 웹사이트인 놀라(Nola)닷컴에 실린 거의 모든 기사들이 '워키즘'(Wokeism)을 반영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워키즘은 인종차별, 불평등 같은 사회문제에 높은 의식을 갖도록 촉구하는 진보 성향의 주장을 뜻한다.
브루스는 특히 기후변화 관련 기사들을 문제 삼았다. 그는 기후변화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 내용에 반대한다고 했다.
브루스는 "놀라닷컴은 몇 주 전에 올 여름 예년보다 빈번한 열대 저기압 활동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지만, 8월 23일 현재 대서양이나 카리브해에서 열대성 기압 활동은 관측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초대형 허리케인 '아이다'가 루이지애나주를 강타했다. 2016년에도 홍수 피해를 심하게 겪은 브루스지만, 기후변화에 대한 생각은 여전하다고 한다. 아이다를 웃도는 규모의 허리케인은 과거에도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브루스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는 기후변화가 과학자나 기자들의 주장보다 훨씬 더 긴 주기 아래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다. 브루스는 과학자와 기자들이 기후변화를 실제보다 다급한 문제로 부풀려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익숙해져서...눈앞의 이익 때문에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브루스의 사례를 들어 기후변화에 대한 미국의 싸늘한 여론이 만만치 않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서 지구온난화의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면,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 가운데 하나인 미국에서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경계감이 커질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브루스 같은 이가 한둘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인 10명 가운데 6명은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이며 그 영향이 분명한 만큼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공화당 지지층이 대부분인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코노미스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음을 앞두고도 예방접종에 반대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 놀랄 일도 아니라고 꼬집었다.
브루스도 다를 바 없다. 그는 허리케인의 위험은 잘 알고 있지만, 기후변화가 허리케인의 빈도와 강도를 높인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다.
사회학자인 앨리 러셀 혹실드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교수는 루이지애나주 해안에 사는 백인 보수층을 상대로 한 연구에서 그 배경을 찾았다. 혹실드 교수는 미국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 가운데 한 곳에 살면서도 환경규제를 혐오하는 이유를 오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삶아지는 냄비에서 개구리는 탈출을 시도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환경오염 피해를 겪으면서도 규제를 싫어하는 또 다른 이유는 눈앞의 이익을 먼저 따지기 때문이다. 브루스도 예외가 아니다. 석유, 천연가스 등을 대거 생산하는 루이지애나주 해안에 사는 주민들은 대개 탄소집약산업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
◇거짓정보의 온상 공화당...전문가 불신도
미국이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론을 주도하게 된 배경엔 정치·문화적인 요인도 있다. 뿌리가 깊은 만큼 제거하기 어려운 장애물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가장 큰 문제로 공화당을 지목했다. 공화당이 지구온난화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제공해왔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공화당은 민주당과 비슷한 무게로 기후변화를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환경규제로 피해가 불가피한 산업계의 자금이 유입되고, 보수 싱크탱크와 정치인, 미디어가 온난화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발신하면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기후변화를 문제 삼지 않게 됐다.
민주당과 공화당은 기후변화의 과학적 근거를 수용하느냐, 기후변화를 날조로 보느냐를 놓고 두 동강 났다.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입장이 정치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근거가 되면서 양당의 대립 구도가 더 깊어졌다.
물론 공화당 내에도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거짓 정보 확산을 경계하는 이들이 있다. 2018년 별세한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이 대표적이었다. 지금은 '보수 성향 기후 코커스'(Conservative Climate Caucus) 회원들이 그 뒤를 잇고 있지만, 공화당 내에서는 여전히 기후변화 부정론이 우세하다. 공화당의 다른 주요 기조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복음주의 기독교 세계관이 그 중 하나다. 트럼프의 열성 지지층이기도 한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뿐 아니라 지구온난화의 과학을 부정한다. 이들은 코로나19 사태나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를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신의 벌로 여긴다.
전문가들에 대한 불신도 만만치 않다. 수십년간 잘못된 정보에 노출된 결과다.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도 이런 요인들이 맞물린 결과였다.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자신이 과학을 가장 부정하는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조차 기후변화에 대한 지지자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봤다.
트럼프는 지난달 유세에서 지지자들에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권했다가 야유를 들어야 했다.
◇희망은 있다...美유권자 '2035 탄소 제로 발전' 지지
이코노미스트는 사태가 심각하지만, 절망적이지는 않다고 지적했다.
우선 신재생에너지 가격이 하락하고 있는 게 긍정적이다. 루이지애나주 등 전통적인 공화당 텃밭에 이를 보급하면, 탈탄소화에 대한 지지가 강해질 수 있다.
아울러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모든 주, 전체 하원의원 선거구 가운데 6개를 제외한 선거구에서 조 바이든 행정부의 탈탄소 계획을 지지하는 이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오는 2035년까지 발전 과정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로 감축하는 '넷제로'(탄소중립)를 달성한다는 방침이다.
유권자들은 탄소 제로 발전에 필요한 자금 수조 달러를 조달하는 방안에도 초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정문이 구조적인 문제로 막힐지 모르지만, 유권자들의 지지로 그 뒤에서는 기능이 마비된 기후정책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