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리포트-부자의 속살]한때 '美최고갑부' 페렐먼의 '비우기'

1989년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 제치고 美 최고갑부 등극 정크본드·차입매수로 명성...과도한 부채, 팬데믹 사태 역풍 2년 새 재산 190억달러서 42억달러로...'어쩔수 없는' 비우기

2020-09-21     김신회 기자

부자들은 선망과 시기의 대상이다. 부자를 꿈꾸는 이들은 많지만 현실이 녹록지 않아서다. 특히 상대적 박탈감을 자극하는 '금수저'들은 부자들에 대한 시선을 불편하게 만든다. 주목할 건 세계적인 갑부들 가운데 다수가 자수성가형이고, 이 비중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 부자 지형과 부자들의 이야기를 [부자의 속살]에서 만나보시라. <편집자주>

로널드 페렐먼 레브론 회장[사진=CNBC 방송화면 캡처]

미국 억만장자 로널드 페렐먼이 요즘 한창인 '비우기'에 동참하고 나섰다. 한때 미국 최고 갑부로 꼽혔던 만큼 그가 비우려는 것들은 일반인들의 집 비우기와 차원이 다르다. 

페렐먼은 전용제트기, 길이 257피트(약 78m)짜리 요트, 수억달러를 호가하는 미술품 등을 처분하려 한다. 미국 중고 비행기 거래 사이트 컨트롤러닷컴에 올라온 그의 제트기(2018 걸프스트림G650)엔 3995만달러(약 464억원)의 가격표가 붙었다.

그는 이미 갖고 있던 회사와 회사 지분까지 처분했다. 미국 전술차량인 '험비'를 만드는 AM제너럴 지분은 지난 7월 미국 사모펀드(PEF) 운용사 KPS캐피털파트너스에 넘겼고, 미국 식품회사 프레이버스홀딩스는 지난 6월 매각했다.

19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페렐먼은 직접 낸 성명에서 일련의 자산을 처분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거나 심지어 원하지도 않는 것들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집을 비우고 (삶을) 단순화하고, 다른 이들에게 내가 수십년간 그랬듯 내가 가졌던 멋진 것들을 즐길 기회를 줘야 할 때라고 결론내렸다."

곧이 듣자면, 일반인들의 집 비우기 이유와 다를 바 없다.

페렐먼의 30년지기인 그레이든 카터 전 배니티페어 편집장은 그를 옹호했다. 카터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종종 다른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이지만, 로널드의 경우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과 가정이라는 부르주아의 안락을 좋아하고 재평가하게 됐다"며 페렐먼이 집에서 5번째 부인 안나, 어린 두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걸 정말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페렐먼의 대변인도 그가 억지로 자산을 처분하는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로널드 페렐먼이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 전용제트기가 중고 비행기 거래사이트 컨트롤러닷컴에 올라 있다.[사진=컨트롤러닷컴 웹사이트 캡처]

1996년 페렐먼의 자서전을 쓴 리처드 핵의 생각은 다르다.

핵은 "단순한 삶을 원하면 오클라호마의 농장을 사면 되지, 뉴욕 맨해튼 타운하우스에서 미술품을 꺼내 팔 건 아니다"라며 "그(페렐먼)가 미술품을 파는 건 현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페렐먼은 미술품 등을 처분해 마련한 현금을 씨티그룹, JP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등에서 낸 빚을 갚는 데 쓸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JP모건, BofA 대출은 미술품 수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입매수'로 명성...과도한 부채+팬데믹 사태에 흔들

올해 77세인 페렐먼은 1980년대 차입매수(LBO)를 통한 인수합병(M&A) 거래로 미국 월가를 주름잡았다. 다만 그의 대담한 거래는 기업 내 갈등과 소송으로 이어지기 일쑤여서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 

당시 차입매수시장이 호황을 누린 건 '정크본드의 왕' 마이클 밀켄의 공이 컸다. 부실기업이 발행해 신용등급이 낮은 정크본드시장을 개척한 이가 바로 밀켄이었고, 페렐먼도 정크본드시장의 개척자 가운데 하나였다. 

정크본드는 보통 할인율이 매우 높다.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을 감수하면 그 이상의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밀켄은 이미 시장에 풀린 정크본드를 거래하는 것보다 새로 발행되는 정크본드를 인수하면 더 큰 이익을 낼 수 있다는 데 착안해 정크본드시장을 키웠다. 

블룸버그는 페렐먼이 자산 매각에 나선 건 팬데믹 사태를 맞아 과도한 부채의 부작용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며, 그가 회장으로 있는 미국 화장품회사 레브론을 예로 들었다.

페렐먼은 1985년 레브론을 17억4000만달러에 인수했지만, 이 회사의 현재 시가총액은 3억6500만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그 사이 부채는 30억달러로 불어났다. 연초 24달러를 웃돌던 이 회사 주가가 최근 6달러 선으로 추락했을 만큼 코로나19 팬데믹 사태의 충격이 컸다.

레브론 최근 1년 주가 추이(달러)[자료=야후파이낸스]

통신은 레브론이 이미 20년 전부터 시장의 변화에 더디게 반응해왔다며, 최근에는 소셜미디어로 고객들의 수요를 끌어모으는 소형업체들에 매출을 잃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레브론의 회사채가 액면가 1달러당 14센트에 거래되면서 회사가 지난해 11월 자금난에 직면했다고 전했다.

주목할 건 페렐먼의 문제가 레브론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그가 레브론 주식을 지주회사 격인 자신의 투자회사 맥앤드류스&포브스가 떠안은 부채의 담보로 쓰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레브론 주가가 올해 70% 가까이 추락하면서 추가 담보를 대거나 부채를 상환해야 하는 압력에 놓이게 됐다는 것이다. 한푼이 아쉬우니 자산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블룸버그의 억만장자지수에 따르면 페렐먼의 순자산은 지난 2년 새 190억달러에서 42억달러로 쪼그라들었다. 미국 투자월간지 인스티튜셔널인베스터는 1989년 5월호에서 페렐먼이 50억달러에 이르는 순자산으로 월마트 창업자인 샘 월튼을 제치고 미국 최고 갑부가 됐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