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터미네이터 랠리' vs '리얼맥코이 버블'
글로벌 증시 흐름을 놓고 미국 월가에서 논란이 한창이다. 증시가 과도하게 올랐다며 거품 붕괴 가능성을 경고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터미네이터' 같은 이번 랠리를 멈춰세울 게 있겠느냐는 낙관론도 만만치 않다.
글로벌 증시는 지난 3월 말 코로나19 쇼크로 폭락한 뒤 강력한 반등세를 뽐내다가 최근 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로벌 주요 증시를 반영하는 FTSE전세계지수가 지난 11일 5% 가까이 추락한 것이다. 3월 대폭락 이후 최악의 급락장이었다. 코로나19 재확산 우려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암울한 경기전망이 투자심리를 위축시킨 결과였다.
지수는 곧 회복세로 돌아서 분기 기준으로 10여년 만에 최고 성적을 낼 기세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급증하고 있는 데도 거침이 없는 모습이다.
미국 뉴욕증시가 글로벌 증시의 랠리를 주도하고 있다. 뉴욕 간판지수인 S&P500은 4월 이후에만 21% 올랐다. 이 추세라면 올 2분기에 20여년 만에 최고의 분기 성적을 기록할 전망이다.
◇죽지 않는 증시 '터미네이터 랠리'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현지시간) 대공황 이후 최악의 세계 경제 침체와 기업 순이익 급감, 지정학적 위기감 고조 등의 악재들도 가차없는 증시 상승세를 늦추기엔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신문이 3월 저점 이후 이어진 글로벌 증시의 상승세를 '터미네이터 랠리'라고 칭한 이유다.
제임스 어데이 애버딘스탠더드인베스트먼트 투자매니저도 "죽지 않을 증권시장"이라며 공감했다.
샐먼 베이그 유니제스천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주식 같은) 위험자산들이 더 오를 여지가 있다"고 거들었다. 그는 채권 같은 안전자산들이 지속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미국 증시의 랠리가 주로 기술주에 집중돼 있는 건 많은 투자자들이 아직 시장에 뛰어들지 않았음을 방증한다고 설명했다.
베이그는 또 추세추종형 헤지펀드 등과 주식의 상관관계가 낮은 것도 상당수 투자자들이 여전히 시장을 관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봤다. 그는 "이들이 움직일 때는 일제히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며 이들이 주가를 더 밀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피터 오펜하이머 골드만삭스 수석 글로벌 주식 투자전략가도 많은 투자자들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로 시장에 복귀할 태세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강세장이 기술주를 넘어 경기민감주로 확대될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경제지표들이 최근 세계 경제의 'V'자 회복 기대감을 북돋고 있는 게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경제지표 개선은 특히 미국에서 돋보인다. 시티그룹의 '경기 서프라이즈 지수'(Economic Surprise index)는 기대치와 비교한 경제지표의 강도를 나타내는데, 미국의 경우 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투자전설' 그랜덤 "4번째 '리얼맥코이 버블'"
비관론자들은 경제지표 개선이 오히려 악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리처드 바웰 BNP파리바 자산운용 매크로 리서치 부문 책임자는 "경제활동이 예상보다 활발해지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무너져 (코로나19의) 2차 파동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증시가 너무 올랐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FT는 특히 미국 증시에 거품이 낀 것으로 보인다며, 주가 수준을 나타내는 경기조정주가수익비율(CAPE)이 30배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장기 평균치의 2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의 최신 월례 펀드매니저 설문조사에서는 5명 가운데 4명(80%) 가까이가 증시가 고평가돼 있다고 진단했다. 1998년 이후 가장 높은 비율이다.
전설적인 투자자 제레미 그랜덤도 증시 거품론에 힘을 실었다. 그는 지난 17일 미국 경제전문방송 CNBC의 '클로징벨'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 증시가 자신의 투자 경력에서 4번째 '진짜 거품'(real McCoy bubble)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큰 고통을 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1989년 일본 자산거품, 2000년 닷컴버블, 2008년 미국 부동산 거품의 붕괴를 예견한 투자로 유명하다.
그랜덤은 미국 증시에 대한 투자비중은 제로(0)로 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견딜 수 있다면 제로 미만으로 하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라고 했다. 미국 증시에 대한 숏(매도) 포지션을 거론한 것이다. 그랜덤 자신도 이미 미국 증시에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네덜란드 자산운용사 NN인베스트먼트파트너의 발렌틴 반 니우벤후이젠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증시가 최근 흔들리면서 랠리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며, 코로나19 2차 파동 등이 일어나면 투자심리가 '리셋'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그린스펀 풋' 역효과 우려도
그랜덤은 이번 랠리가 실업자수와 파산사태를 비롯한 냉혹한 경제 현실과 상충된다는 점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시장이) 미쳤다"고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연준을 비롯한 중앙은행들의 강력한 통화부양이 이번 랠리의 핵심 동인이기 때문에 증시와 실물경제의 괴리(디커플링)가 일어났다고 본다.
NN인베스트먼트파트너의 니우벤후이젠 CIO는 연준과 다른 주요 중앙은행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며 증시 반등을 북돋고 있는 것을 "강력한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 on steroids)이라고 불렀다.
그린스펀은 1987년 8월부터 2006년 1월까지 연준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을 말한다. 취임 2개월 만에 뉴욕증시 대폭락 사태(블랙먼데이)를 맞은 그는 수개월에 걸친 금리인하로 증시 반등을 이끌었다. 시장에서는 당시 그린스펀의 강력한 통화부양 조치를 '그린스펀 풋'이라고 부른다. 자산가격의 하락 위험을 피할 수 있는 '풋옵션'과 비슷하다는 의미에서다.
그린스펀의 과도한 통화완화 조치는 미국 부동산시장의 거품을 만들어 결국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씨가 됐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랜덤은 중앙은행들의 경기부양이 계속되길 바랄 수는 없다며, 역대 최대 통화부양 공세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