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내외수 복합성장'으로 1500원 뉴노멀 환율 피해야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을 넘어 1500원 수준에서 장기적으로 고착화된다면, 한국경제는 수입물가 상승·소비 위축·투자 불안정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한 환율 변동이 아니라 경제 구조 전반의 체질 변화를 요구하는 '뉴노멀' 시대의 신호다.
고환율의 구조적 배경을 살펴보면 요즘 흔히 거론되는 서학개미들의 대규모 미국 시장 투자 외에도 국내외 금융시장에 풀린 막대한 자금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미관세협상 결과로 매년 200억달러가 대미투자로 넘어가는 것 역시 시장에 심리적으로 큰 원화 약세 요인이 된다. 다만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정책은 동결과 인하 사이에서 저울질이 한참이어서 변수는 여전하다.
환율 1500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뉴노멀'을 상징한다. 이는 위기이자 기회가 된다. 고환율 시대를 버티려면 내수 기반 강화, 산업 고도화, 금융시장 신뢰 회복이라는 세 축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데 이같은 과정을 통해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한 기회로 활용될 수도 있다. 이른바 '내외수 복합성장' 전략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고환율의 덫'에 갇혀 장기 침체의 길로 들어서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할 수 없다.
◇서학개미 투자에 시중 통화량(M2)마저 급증, 자산버블 커지면서 환율 상단 위협
9월 시중 통화량(M2)이 크게 늘어나면서 잔액이 4430조원을 넘어섰는데 이는 역대 최고치이다. 증시 호조세에 주식형을 중심으로 수익증권이 증가세를 지속하는 가운데 증시 투자 대기성 자금 유입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분기말 재무비율 관리를 위한 자금 유입도 있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12일 발표한 '2025년 9월 통화 및 유동성'에 따르면 올해 9월 M2(광의통화, 평잔)는 전월대비 30조3000억원(0.7%) 늘어난 4430조3000억원에 달했다. 이같은 수치는 역대 최대치로 6개월째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전년대비 증가율은 8.5%이다.
M2는 단기 저축성 예금, 정기예금, 자산관리계좌(CMA), 머니마켓펀드(MMF) 등으로 구성되는데 '조금 묶여 있지만 필요하면 꺼낼 수 있는 돈'이라서 언제든지 시중에 풀릴 수 있는 자금 규모를 알려준다. 어쨌든 통화량 증가는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원화가치에 하방압력을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다 서학개미는 물론 국민연금 등의 미국 주식 사냥도 환율 상승압박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18일까지 국내 투자자들이 순매수한 해외주식 결제금액은 37억8341만달러(약 5조5500억원)에 달한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전체로 보면 276억4965만달러로 이미 지난해 순매수 규모 101억183만달러보다 173% 많다는 것이다.
또 6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9월 말 기준 국민연금은 미국 552개 상장 종목에 투자 중인 것으로 나타났는데, 국민연금이 보유한 미국 주식의 시장 평가액은 1158억3000만달러에 달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환율이 크게 올라 국내외 투자자들 사이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AI(인공지능) 거품론'이 확산되자 나스닥은 6% 정도 조정을 받았는데 원·달러 환율은 10월 평균 1422.8원에서 11월 21일 종가는 1475.6원을 기록해 3.7% 올랐다. 단순계산으로 따지면 미국 주식 투자자들은 주가하락으로 6% 손실을 보았지만 환차익을 3.7%나 얻어 실질 손실은 2.3%에 불과했다.
반면에 국내투자자들은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있다. 코스피가 10월 말 종가 4107.5에서 21일 종가 3853.26으로 투자자들에게 6% 가까운 손실을 입혔지만 서학개미들처럼 환차익을 얻지 못한 반면에 외국인 투자자들은 그만큼 환차손을 본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스닥이 아무리 조정을 받아도 서학개미들은 미국 주식을 팔아 국내에 가져오지 않는다.
아무튼 원화값이 그 어느 나라 통화와 비교해보아도 줄기차게 떨어져 한국의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올해 10월 말 기준 89.09포인트로, 한 달 전보다 1.44포인트 하락했다고 한다. 이는 금융위기 때인 2009년 8월 말(88.88) 이후 16년 2개월 만에 최저치이다. 비상계엄 사태가 국내 금융시장을 강타하면서 모든게 붙투명해진 지난 3월 말의 89.29보다도 더 낮은 수준이니 문제의 심각성을 알 만하다.
국민은행 이민혁 연구원은 "국민연금 환헤지로 방어할 경우 단기적 상단은 1480원 선이지만 1500원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수출기업들 중심으로 달러 매도가 나와야 하는데 환율 추가 상승 불안감에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민혁 연구원에 따르면 구조적으로는 우리나라 투자자들의 해외 주식 투자 수요가 늘어난 것과 유동성 지표 중 가장 대표적인 M2가 미국은 4~6%가량 증가한 반면 한국은 7~8% 증가하며 원화가 달러보다 많이 풀려 상대적으로 원화 가치가 낮아진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갈수록 커지는 AI 거품론에도 대비하기 위한 '내외수 복합성장' 체질화해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가 GDP(국내총생산) 순위에서 한국은 2024년 12위에서 2025년 14위로 하락했다. 2024년 우리나라보다 밑에 있던 스페인과 멕시코가 위에 올라갔다. 아무래도 유로화 강세와 경쟁국에 비해 크게 떨어진 원화값이 큰 영향을 미쳤다. 멕시코 언론들은 IMF 추정치를 인용해 멕시코의 GDP 규모가 한국보다 높다고 보도하면서 자축을 했다.
미국 달러는 물론이고 거의 전세계 모든 통화에 약세를 보이고 있는 원화는 멕시코 페소화에 대해서도 1년간 대략 10% 전후로 약세 흐름을 보여왔다. 이는 한국경제의 환율 불안과 멕시코 경제의 상대적 안정성이 동시에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원화 약세가 지속되면 2026년에는 턱밑의 15위 호주에 밀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원화약세는 곧바로 정치무대에 옮겨가 정쟁의 불쏘시개 역할로 변질될 것이 뻔하다. 아무튼 국가 GDP 순위가 원화 약세로 지속적으로 흘러내리면 아무리 천문학적인 광고를 해외에서 집행한다고 해도 한국산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입을 상처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미 이같은 일을 겪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참조할 필요도 있다. 전후 국가 GDP 순위에서 미국에 이어 부동의 2위를 차지했던 일본 경제는 아베노믹스의 '엔저'(엔화 약세)가 지속되더니 중국에 뒤쳐진지는 오래되었고 독일에도 밀리고 이제는 인도에 4위라는 자리마저 내주어야 하는 처지에 빠졌다.
미즈코시 다카시 야노경제연구소 회장은 "엔화 평가절하는 주요 기업들의 강한 실적의 한 원인이다. 하지만 달러 표시 기준으로 보면 엔화 가치 하락은 국가 권력 하락에 불과하다"면서 엔화가 떨어지면 수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질 것이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싸구려 일본'으로 남아도 괜찮을까?"라고 반문한다.
노구치 유키오 일본 히토츠바시대 명예교수 역시 일찍이 엔화가치 하락에 대해 "문제는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임금이 달러 기준으로 하락함에 따라 해외 노동력과 고숙련 인재를 일본으로 유치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으며 재능 있는 일본 인력의 해외 이동도 눈에 띄고 있다"면서 "이러한 추세는 일본의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크게 저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또 일본경제가 '엔저'에 의존하면서 기술 혁신이나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구조 개혁이 지연되었다는 경고를 빠트리지 않았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책적으로 '원화 약세'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외국인 투자자에게 한국 경제가 안정적이고 성장성이 있다는 신뢰를 주는 방법밖에 없다. 이른바 수출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수 기반 역시 튼튼하게 만드는 '내외수 복합성장'의 체질화가 절실하다.
원화 가치를 높이기 위해 내수를 진흥하려면 소비여력 확대, 내수기업 경쟁력 강화, 서비스산업 고도화, 외국인 소비 유치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 단순히 환율 개입이 아니라, 국내 경제의 체질을 개선해 원화 수요를 늘리는 전략이 핵심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다. 무엇보다 서학개미들의 국내시장 환류를 유도하기 위한 세제유인 등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변수는 또 있다. 이미 수차례 경고가 나왔지만 미국 시장에서 진짜 AI 거품이 터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발 AI 거품 붕괴로 서학개미와 국민연금 자금이 한꺼번에 국내로 회귀하면서 외환시장이 단기적으로 요동칠 수 있다. 달러 매도·원화 매수 급증은 환율 급락을 불러오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원·달러 환율은 1200원 밑으로 내려가는 원화 초강세 시장이 연출될 수도 있다. 국내외 주식시장의 붕괴와 함께 원화 초강세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금융시장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20년 전인 2005년에 'BOK 쇼크'를 경험한 바 있다. 한국은행(Bank of Korea)이 외환시장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발언이나 외환보유액 운용 정책 변화와 관련한 박승 당시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으로 그해 2월과 5월에 원·달러 환율이 900원대까지 급락했었다.
최근 몇 년간 원·달러 환율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용된 시기는 2015~2017년(약 1100~1200원대)와 2021년(약 1150~1250원대)였다. 이 시기에는 글로벌 경기 회복과 수출 호조, 코로나 백신 보급 등으로 환율 변동성이 줄어들며 안정세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환율이 그때 수준으로 갑자기 돌아가면 우리 경제에 또 한번 충격을 줄 것은 분명하다.
원·달러 환율 1500원이 뉴노멀이 되는 것도 피해야 하지만 과도하게 외환시장이 위아래로 출렁이면서 쏠림을 연출하는 것도 억제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경제의 체질이 수출과 내수가 서로 보완하는 '내외수 복합성장'이라는 화두에 충실해야 하고 자원의 과도한 쏠림을 막아야 함은 물론이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