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혼돈의 금융시장, '만능해결사' 국민연금의 깊어지는 딜레마

2025-11-17     이용웅 주필
이용웅 주필

한국 경제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라 할 수 있는 '금리 하락-증시 상승-원화 강세'의 삼박자가 좀처럼 맞춰지지 않고 있다. 이 혼란의 배경에는 미국발 AI(인공지능) 거품 논란, 한국은행의 긴축적 신호, 그리고 외환시장의 구조적인 불안이 겹쳐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불안한 시장의 수습 주체로 국민연금이 반복적으로 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4일 금융시장은 우리 경제가 처한 모순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하루였다. 연일 급등하던 코스피는 전날보다 159.06포인트(3.81%) 하락한 4011.57에 마감했다. 외국인이 하루 만에 2조3574억원을 내다 팔았고 기관도 9000억원 넘게 순매도했다. 이들이 내놓은 거대 물량은 모두 개인이 받아냈다. 

환율 시장도 혼란스러웠다. 통상 주식시장이 급락하면 원·달러 환율은 급등하는데, 이날은 오히려 하락했다. 장중 변동폭이 21.9원(1452.40~1474.30원)에 달할 정도로 급변동하더니 전장보다 10.7원 내린 1457.0원에 거래를 마쳤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국민연금과 수출업체 등 주요 수급주체와 협의해 환율 안정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발언이 시장에 영향을 준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코스피 급등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은 상승세를 유지하면서 1500원선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금리는 급등했다. 14일 시장금리의 대표 지표라고 할 수 있는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전일대비 1.2bp(1bp= 0.01%포인트) 오른 4.944%에 마감했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인다. 채권 가격 추락은 재정확장을 추진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불길한 징조이다. 

이날은 증시·금리·환율이라는 시장의 세 축이 동시에 비틀린 날이었다. 

사진=연합뉴스

◇금리·주식·환율의 비틀린 시황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2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금리 인하의 규모·시기, 심지어 방향 전환도 새로운 데이터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시장을 자극한 건 '방향 전환'이란 표현이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하기는커녕 부동산을 잡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올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인 것이다. 

이 총재 발언은 시장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어 국고채 금리가 급등했다. 국채 가격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금리가 오르면 재정 부담은 더 커진다. 문제는 정부만 금리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도 같은 고통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의 14일 기준 주택담보대출 혼합형(고정) 금리(은행채 5년물 기준)는 연 3.930∼6.060% 수준으로 알려졌다. 고점이 6%대인데 이같은 금리는 일반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위협하고 있다. 금리상승 기조는 코스피 5000시대를 약속한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시장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 금리가 뛰는데도 증시는 고점을 향해 달려왔다. 코스피 5000을 호언한 정부의 기대와 달리, 금리 상승은 주식의 밸류에이션을 깎고 외국인 매수여력을 감소시키지만 꼭 그렇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코스피가 아무리 올라도 환율은 고점에 머물며 수입물가를 압박해 국민 실질소득을 갉아먹어 왔던 게 저간의 현실이다. 그런데 14일 금융시장은 코스피와 환율이 같이 떨어지는 기묘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그래픽=연합뉴스

◇국민연금, 증시·채권·환율까지 떠안는 '만능 리스크 흡수기'가 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운용자산은 지난달 말 기준 1400조원을 넘었다. 코스피가 4200선을 넘으면서 지난해 1212조원 수준이던 운용자산이 200조원 이상 늘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올 들어 연간 누적 수익률이 20%를 넘기고 있는 상황인데 주식호황이 이어지면 연말까지 25%까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최근 3년 평균 수익률이 6.98%였고 1988년 설립 이후 연평균 수익률 기록을 보아도 6.82%에 달하기 때문에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시장에 몰입한 것이 기대 이상의 수익을 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8월 말 기준 국내 주식 수익률은 36.4%에 달해 전체 성과를 주도했다. 코스피 상승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해외주식 역시 8.61%의 견조한 성과를 기록했다. 물론 시황에 좌우되는 수익률은 언제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 

2025년 6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총 적립금은 1269조1355억원이며, 이 중 주식 투자액은 635조5734억원(50.1%)으로 절반을 넘었다. 이는 2015년 말 채권 비중이 56.6%, 주식이 32.2%였던 구성과 비교하면 국민연금의 투자가 공격적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2025년의 20%대 수익률은 글로벌 연기금 중에서도 압도적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일본 공적연금(GPIF), 노르웨이 국부펀드 등 주요 연기금은 보통 연 4~6%대 수익률을 기록하는데, 국민연금의 올해 성과는 이들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그래픽=연합뉴스

하지만 일본 GPIF는 안정적 자산배분(주식 50%, 채권 50%)을 유지하며 장기 3%대 수익률을 목표로 하고 있고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주식 비중이 70% 이상이지만, 석유자원 기반으로 국민연금과 구조가 다르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9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한국 증시가) 저평가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수요 부족일 수 있다"며 "그 중 하나 예를 들면 국내 연기금들은 국내 주식 투자 비중을 줄이고 외국 주식만 잔뜩 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저평가된 국내 증시 활성화를 위해선 ‘큰 손’인 국민연금공단이 국내 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독려한 셈이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투자를 늘리기 위해 자산배분 규정(SAA) 변경과 전술적 자산배분(TAA) 활용, 대형주 중심 투자 확대, 장기 전략 재검토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의 국내주식 목표 비중은 약 14.9% 수준인데 TAA 제도를 통해 기존 목표치에서 ±2%포인트 추가 조정이 가능하다. 이를 활용하면 국내 주식 비중을 최대 19.9%까지 확대할 수 있어 약 30조원 규모의 추가 매수가 가능하다. 중장기적 대책으로는 SAA 개정을 통해 국내주식 목표 비중 자체를 상향 조정할 수도 있다. 

문제는 국민연금 투자 규모가 워낙 커서 시장 변동성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단기적으로는 증시 부양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고위험·고수익 전략은 국민 노후 자산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비판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구윤철 부총리가 환율 안정에 국민연금의 역할을 강조한 부분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어차피 수익률 관리를 위해서 환율 변동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국민연금은 외환시장에서 통상 기획재정부, 한국은행과 비공식적으로 협조해왔다. 예를 들어 지난 2022년 레고사태 등으로 환율이 1400원대 급등했을 때, 정부는 국민연금에 "달러 환전 일정을 분산해달라"고 요청했고, 국민연금은 해외투자대금 지급 시 시차를 두고 달러를 매수해 환율의 단기 급등 완화에 기여한 경험이 있다. 

그래픽=연합뉴스

이처럼 국민연금이 일부 해외주식이나 채권을 매도하고, 그 자금을 다시 원화로 환전(달러 매도) 하면, 외환시장에서 '달러 공급 증가 → 환율하락' 요인이 된다. 다만 이같은 방법은 단기적으로 시장에 영향을 줄 수 있어도  장기 포트폴리오 조정 목적이 아닌 이상, "환율방어용"으로 적극 활용하긴 어렵다. 

다만 통화스왑·선도계약 만기 연장 또는 조기청산 조정 등으로 기존 선도환 계약 중 달러매도 포지션을 늘리거나, 환율이 급등할 때 추가 매도 포지션을 설정하면 시장에 "국민연금이 달러를 팔고 있다"는 시그널이 퍼지면서 환율 안정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달러 매도 등 직접적인 외환시장 개입은 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의 독립성을 지켜야 하므로, 정책 목적(환율 안정)보다는 수익률과 위험관리 중심으로 움직여야 함은 당연하다. 

채권시장에서도 국민연금은 막대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국채 금리 급등으로 국고채 상장지수펀드(ETF)들의 가격하락폭이 큰데 여기서도 국민연금은 구원투수로 등장할 수 있다. 'RISE 국고채10년액티브'가 –1.42%, 'HANARO 32-10 국고채액티브'와 'WON 대한민국국고채액티브' 역시 각각 –1.33%, –1.75% 하락하며 약세 흐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국민연금은 국내 채권 보유액이 300조원대 수준에 달한다. 시장 불안으로 금리가 급등할 때나 다른 기관들이 채권을 팔아 금리가 오를 때 국민연금은 장기 투자자이므로 패닉성 매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매수 기조를 유지해 금리 안정에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국민연금은 지금 주식·채권·외환 시장에서 '만능 해결사'처럼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금 고갈 시점이 다가오는 구조적 현실, 정치적 압력과 독립성의 충돌, 글로벌 분산투자 약화라는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세계 주요 연기금이 장기 안정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것과 달리, 국민연금은 단기 성과와 정책적 요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국민연금이 직면한 진정한 딜레마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