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테크+/⑰]반도체 '슈퍼 을'

2025-11-16     배충현 기자
ASML 로고 / 사진=연합뉴스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계에 독보적인 기술로 최고의 위상을 갖춘 업체가 있다. 바로 ASML이다.

ASML은 미국이나 일본, 중국, 대만 등 전 세계 반도체 경쟁 주요국과는 다소 생소한 네덜란드 기업이다. 그리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슈퍼 을'로 통한다. '슈퍼 갑'이 아닌 '슈퍼 을'이다.

'을'로 불리는 이유는 반도체 파운드리(생산)에 협력 업체 지위 때문이다. '슈퍼'가 붙은 것은 파운드리들에게 ASML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는 이유다. 바로 전 세계 관련 분야에서 ASML은 절대적 위치에 있다.

반도체 업계에는 '소부장'이라는 용어가 있다.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 필수적인 소재, 부품, 장비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소부장 산업은 미국과 일본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지속적인 경쟁력을 위해서는 '소부장을 육성해야 한다'는 언론 뉴스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일본의 소부장들도 어찌할 수 없는 장비 업체가 바로 ASML이다.

ASML은 반도체 초미세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노광장비를 제작하는 대표적 소부장 기업이다. 반도체 제작 단계 중 웨이퍼 표면에 빛을 쏴서 설계된 회로를 세기는 공정이 바로 '노광'이다. 이 회로가 미세할 수록 웨이퍼에서 생산할 수 있는 반도체 칩 수가 증가한다.

한정된 웨이퍼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회로를 세기는 것은 반도체 성능과 직결된다.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려면 빛으로 머리카락 5000분의 1 굵기 이하의 미세한 회로를 그려야 한다. 이처럼 세밀한 작업은 극자외선(EUV)을 발사하는 노광장비만 가능하다.

현재 전 세계 노광장비 시장은 단 3개 업체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카메라 제조업체 니콘(Nikon)과 캐논(Canon) 그리고 네덜란드의 ASML이다. 

중요한 것은 성능과 시장 점유율이다. 업계에 따르면 관련 시장에서 ASML의 점유율은 90% 이상으로 절대적이다. 일본의 니콘과 캐논은 최근 대규모 투자에 나서며 반도체 공정부분 노광장비 시장 확대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핵심 기술 등에서 ASML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따라 향후 ASML의 독보적 지위는 더욱 공고히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높은 가격과 희소성도 ASML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다. ASML이 생산하는 노광장비 한 대 가격은 4000억원을 넘는 수준, 일년에 생산할 수 있는 것도 40여대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높은 대당 가격에도 희소성에 대체제가 없다 보니 세계 주요 반도체 파운드리들이 ASML의 노광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SML의 노광장비를 확보할 수 있느냐는 안정적인 반도체 생산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바로 ASML이 반도체 완제품 생산업체(갑)에 장비 공급업체(을)임에도 '슈퍼 을'로 불리는 이유다.

반도체 웨이퍼 / 사진=연합뉴스

우리나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ASML의 노광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초 연구개발을 위해 ASML의 최첨단 'High(하이) NA EUV' 장비를 국내에 설치한 데 이어 연내 양산용 장비를 추가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도 지난 9월 ASML의 양산용 하이 NA EUV 장비를 이천 M16팹(Fab)에 도입했다.

하이 NA EUV는 기존 EUV보다 해상도를 대폭 높인 차세대 노광장비로 한 대당 가격이 5000억원을 넘는 수준이다. 2나노 이하 시스템반도체와 10나노 이하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장비로 꼽히는 ASML의 하이 NA EUA는 연간 생산 가능 물량이 매우 적어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물량 확보 경쟁이 매우 치열한 장비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사업 강화를 위해 2나노 공정 성능 및 수율 향상을 위해 ASML의 최첨단 장비를 우선 투입하고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고성능 D램의 기술력 고도화에도 활용할 계획이다.

SK하이닉스 역시 고성능 HBM 등 고성능 AI 메모리 라인업 확대에 주력하고 있는 만큼 새로 도입한 ASML 하이 NA EUV 노광장비를 주요 핵심 공정에 투입해 적극 활용할 전망이다.

특히 주목되는 건 최근 ASML이 우리나라에 직접 투자한 화성캠퍼스가 준공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과 협력이 더욱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지난 12일 준공식이 열린 ASML 화성캠퍼스는 경기도 화성시 동탄신도시에 약 1만6000㎡(약 4840평) 규모로 새로 구축됐다.

앞서 ASML은 올해까지 약 2400억원을 투자해 경기 화성에 반도체 장비 클러스터인 '뉴 캠퍼스'(화성캠퍼스)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는데, 이번 준공식으로 관련 계획이 가시화된 셈이다. 

준공식에 참석한 푸케 ASML CEO는 "화성시에 캠퍼스를 조성하기로 한 것은 매우 전략적인 결정"이라며 "새로운 화성캠퍼스는 한국 고객과의 신뢰, 혁신, 지속 가능성 그리고 성장을 향한 ASML의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라고 말했다. 화성캠퍼스가 ASML의 아시아 핵심 거점으로 국내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안정성 강화와 기술 내재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푸케 CEO가 강조한 것이다.

실제 ASML은 화성캠퍼스 준공을 계기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과의 공정 협력 및 기술 교류를 강화하고, 국내 소부장 기업과의 연계 생태계를 구축하는 등 협력 모델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이제 '슈퍼 을' ASML과 국내에서 더욱 긴밀한 협력 체계가 가능해진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향후 글로벌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날개'가 마련될 지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배충현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