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젠슨 황·이재용·정의선 3자 '치맥파티'에 숨겨진 '치킨게임'의 유혹
HBM3E 전쟁의 서막, 엔비디아의 '공급망 외교' 전략 분석
"젠슨 황이 탁구장 청소로 용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성적이 올 A인 우수학생이 탁구챔피언이 되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라 3개월 배운 탁구 실력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인공지능(AI) 돌풍을 일으킨 엔비디아 젠슨 황(黃仁勳) CEO에 대한 대만 경제주간지 금주간(今周刊)의 특집 기사에 나온 내용이다. 그는 9살 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부모를 따라 미국에 이민을 갔고, 14세 때인 1977년 전미 청소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다. 이 경험은 훗날 '불가능에 도전하는 리더십'의 뿌리가 됐다.
1993년, 그는 30세 생일을 앞두고 친구 두 명과 함께 4만 달러로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5조 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3위 경제대국인 독일의 GDP를 넘어섰다. 탁구채를 잡던 손이 이제는 글로벌 AI 반도체 생태계를 주무르고 있는 셈이다.
◇자수성가형 기업인 젠슨 황이 우리 재벌 3세 경영인을 길 위로 인도하다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굵직한 정치적 이벤트를 마무리하고 1일 폐막했다. 한미·한중·미중·한일·중일 정상회담 등 세계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대형 이슈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마무리하고 핵잠수함 건조계획을 밝히는 등 대형 이슈가 잇따라 터졌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정상들의 회담보다는 젠슨 황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치맥 회동'에 열광한 반면에 세계인들 특히 미국인들은 이재명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신라금관에 놀라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를 풍자하는 각종 밈이 SNS 공간을 달구었고 미국 방송사들의 심야 토크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미국 케이블채널 코미디센트럴의 토크쇼 '더 데일리 쇼'의 진행자 데시 리딕은 29일(현지시간) 방송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공항에 내리면서 '케팝 데몬 헌터스'의 주인공들이 실재 인물이 아님을 알고 실망하자 한국 군악대는 (트럼프가 좋아하는) YMCA를 연주해주었다"고 비꼰 뒤 "사우스 코리아! 지금 뭐하는 짓이냐. 우리는 지금 대통령이 '왕 놀이'에 빠지지 않게 하느라 애쓰고 있는데"라고 신라금관 선물을 비난했다.
한편 젠슨 황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3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깐부치킨에서 치맥 회동을 즐기는 모습을 창밖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지켜보자 김밥과 빙그레 바나나 우유 등을 나눠주는 파격을 선보였다.
빙그레는 이같은 기회를 놓칠새라 지난 31일 공식 인스타그램에 이벤트 공지를 게시하고 "물 들어올 때 노 젓겠습니다. 바유 100개 쏘겟슨. 황송합니다"라는 문구를 남겼다. 포스터에서는 '겟슨'과 '황'을 노란색으로 강조해 '젠슨 황'을 연상시켰다.
덕분에 이재용, 정의선 회장도 일반 시민들과의 간극을 메우는 효과를 빚었다. 어찌보면 굴지의 재벌기업이라는 틀 안에 갇혀있던 두 대기업 총수가 성큼 대중 속으로 들어서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혼자 힘으로 세계정상에 오른 젠슨 황이 아직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어색한 모습으로 보이는 한국 그룹 총수들을 길거리에 초청한 셈이다.
깐부치킨의 치맥은 단순한 화제 이상의 의미였다. HBM3E·GPU 공급망을 둘러싼 '비공식 정상회담'이었다.
파격적인 치맥파티가 끝난 그 다음날 엔비디아는 2030년까지 한국 정부와 삼성, 현대자동차, SK, 네이버 등 4개 기업에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총 26만 개를 우선 공급키로 해서 정부는 물론 국내 기업들 그리고 이들 주식에 투자한 개미들까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최대 14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계약인데 정부와 국내 기업들은 품귀 현상을 빚는 엔비디아 GPU를 조기 확보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해온 주권형(소버린) AI 구축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로써 한국은 기존 6.5만 장에서 30만 장 이상으로 GPU 보유량이 급증하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 메모리)3E 공급사로 직접 수혜를 입게 된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보면 젠슨 황은 한국에서 엄청난 매출 효과를 내어 엔비디아의 앞날에 꽃길을 까는 그런 영업 수완을 보여준 것이다.
예전부터 유명한 젠슨 황의 쇼맨십은 기술 리더십을 넘어서 대중과의 소통, 브랜드 이미지 구축, 협상력에서 빛을 발해왔다.
그는 항상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고 등장해 '테크 락스타' 이미지 구축하는 한편 강력한 스토리텔링 능력으로 기술을 단순한 사양이 아닌 인류의 미래와 연결된 서사로 전달해왔다. 특히 현장 퍼포먼스행사장, 무대, 인터뷰에서 직접 시연·발표하며 보는 이들의 몰입감을 유도하는 탁월한 퍼포먼서이다.
◇SK 하이닉스 준독점구조에서 삼성전자 가세하는 HBM3, HBM4 시장에서 치킨게임 가능성은
작년 3월, 젠슨 황은 미국에서 열린 연례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4' 행사장에서 삼성전자 부스를 찾아 삼성전자의 HBM3E 샘플 위에 "JENSEN APPROVED"라는 글귀와 함께 서명을 남겼다.
그는 전세계 기자들과 Q&A 세션에서 '삼성전자의 최신 HBM을 사용하고 있나'는 질문을 받자 "삼성의 HBM3E를 아직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현재 검증하고(qualifying) 있다"고만 밝혔다.
당시 한국에서는 젠슨 황의 이같은 말이 전해지자 삼성전자 주가가 급등하기도 했지만 엔비디아의 삼성제품 수용이 차일피일 늦춰지자 주가는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젠슨 황은 삼성전자 제품 수입은 미루는 대신 5월에 대만에서 열린 '컴퓨텍스 2025'에서는 SK하이닉스 부스를 찾아 "LOVES SK HYNIX!"라고 쓰고 서명을 남겼다.
이 장면만으로도 업계는 즉각 반응했다. 젠슨 황은 삼성과 하이닉스를 교묘히 저울질하며, HBM 공급가격 협상에서 엔비디아가 '갑'(甲)으로 군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엔비디아가 수입하는 HBM의 가격전망은 어떠한가.
시장조사업체 욜그룹은 2025년 이후 HBM의 평균판매가격(ASP)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지만 AI 칩 수요 확대 등으로 인해 하락 폭은 제한적일 것으로 분석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센터장 역시 지난 달 2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반도체 시장 정책 동향 세미나'에서 오픈AI, 소프트뱅크 등과 기존 클라우드 사업자들 간의 인공지능(AI) 시장 주도권을 둘러싼 패권 경쟁이 지속되면서 내년 HBM 시장이 500억 달러(약 72조원)를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현재 시장은 HBM3 및 HBM4로의 기술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데 고사양 제품의 수요는 지속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김규현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담당(부사장)은 지난 달 29일 열린 2025년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최근 AI컴퓨팅이 추론으로 확장되면서 일반 서버 수요 증가를 유도하고 있다"며 "공급 측면에서는 HBM 생산 확대를 위해 더 많은 클린룸 공간 확보하더라도 전체 생산량 증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점유율 약 50~60%로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수율과 발열 문제로 다소 뒤처졌지만, 최근 HBM3E 12단 제품의 엔비디아 인증을 획득하며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삼성이 엔비디아 공급망에 합류하게 되면 가격 경쟁(즉, 'HBM 치킨게임')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단순한 덤핑 경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낮다. HBM은 TSV 적층·열처리·클린룸 제어 등 기술 장벽이 높아 캐파 확장이 쉽지 않으며, AI 수요는 여전히 폭증세이기 때문에 이번 경쟁은 '기술 속도전'이지 단가 인하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가 이번에 공급하기로 한 GPU는 최신 'GB200 그레이스 블랙웰'인데 가격이 지난해 대비 약 20~30% 상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수요 폭증, 공급망 긴장, HBM3E 메모리 가격 상승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때문에 엔비디아로서는 삼성전자 제품의 수급이 이제 그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또 엔비디아의 AI용 GPU 연간 공급량은 올해 약 200만~250만 장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하면 이번에 한국이 확보한 26만 장은 전체의 10~13%에 달해 엔비디아는 안정적인 판매처를 확보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이번 젠슨 황의 이재용, 정의선 두 회장과의 만남은 엔비디아의 고도의 생존 전략 내지 영업 전략의 연장선인 것이다. 이 자리에 HBM3의 주요 공급자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빠진 사실은 그런 배경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가능하다면 삼성과 SK 두 회사가 공급확대를 위해 조금이라도 치킨게임을 전개한다면 엔비디아 입장에서는 이보다 나은 '금상첨화'는 없을 것이다.
엔비디아는 지금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 첫째, 삼성의 진입으로 가격 협상력을 확보하고, 둘째, 지정학적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중국과 대만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은 엔비디아에게 '안정적 생산 거점이자 전략적 고객'이다.
한국과의 대규모 GPU 계약은 바로 그 포석 위에서 이뤄졌다. 젠슨 황에게는 삼성전자의 HBM이 "가격 안정과 공급 안전"을 동시에 확보할 마지막 퍼즐이 된 셈이다.
이번 APEC 회의에서 가장 큰 승자는 풍자가 섞인 평가이지만 신라금관을 받은 트럼프 대통령일 수도 있다. 하지만 GPU 수요와 공급 문제를 모두 해결한 젠슨 황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기술 CEO를 넘어, 외교와 산업 전략을 넘나드는 '퍼포먼스형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이용웅 주필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