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과 함께하는 순간, 당신 옆에는 누가 있는가?

건조한 대화를 나누거나 모니터만 바라보는 직장동료? 일상을 가십 삼아 마음 편히 수다 떠는 친구 또는 애인? 오랜만에 저녁식사로 모인 가족들? 그도 아니면 오늘 처음 본 3자?

일상의 한 부분으로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행위’가 타인의 눈에는 나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때가 있다. 마치 입고 있는 옷, 패션 감각으로 사람의 성격을 함부로 추론하듯, 주변인물로서 나라는 자아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되어버리는 것이 사회의 일면이다.

주변인물로서 평가되는 ‘나’라는 거울

만약 동행인이 거지꼴을 하고 다닌다든가, 혹은 겉은 멀쩡한데 거친 입담과 행동을 지닌 채라면, 그저 지나가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 않고서 당신은 동행에게 동조할 수 있겠는가?

전후 어떤 사정으로 그런 상황이 되어있든 신경을 쓰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집단에서라면 자연스레 발생하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저 스쳐가는 인연일지라도, 아니 그렇기에 찰나의 이미지로서 자신이 평가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주변은 또 다른 의미로 자신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럼 연예인처럼 블링블링한 이들만 옆에 두고 다니면 내 이미지도 동반상승할 거라 봐도 될까? 그럴 리 없다.

찰나와 같은 첫 시선에 한정이라면 이 정도 외적요소로 충분할지 모르지만, 2차 각인으로서 직접 주시하며 알게 되는 행동이나 버릇, 거기에 들려오는 지인정보들로 3차적 각인을 거치면 어느덧 나의 주변인으로서 파악되는 이미지에 나 역시도 그의 주변인으로서 묶여 동일선상의 이미지로 크로스 된다. 이른바 ‘거울’처럼.

이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벼이 사람을 평가하는 대중이라는 시선에 대해 화가 나거나 속상한 경우들 한 번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본다면, 타인의 시선에 이해와 자비를 구하는 것도 오류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변인. 그들이 찾아온 게 아니라, 결국 그대가 부른 것이다

‘왜 네 주변엔 그런 애들뿐이니?’ 라는 말이 불쾌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아끼거나 친하게 가깝게 두는 사람들을 혹평하는데 좋아할 이유야 없지만, 그것이 곧 자신에 대한 비난이라 여겨지게 되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우정이든 애정이든 비즈니스든, 굳이 싫어하는 사람을 옆에 두는 사람은 없을 터.

결국 자연스레 성향에 맞는 이들에게 주변을 허락한 건 자신이며, 그 선택으로서 나 역시 어떤 사람인지로 보여지고, 그들에 대한 비난에 나의 내면까지 부정되는 듯 불쾌해 지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 주변정리란 그런 뜻이기도 하다.

옆에 누가 있느냐로,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과거 조선역사에 ‘진령군’이라 불리운 사람이 있다. 군이라 칭하지만 여자이며, 또한 무당이다. 명성왕후가 임오군란으로 지방에 피신하면서 그녀를 알게 됐고, 왕후의 환궁시기를 맞추면서 환심을 얻은 그 무당은 조정에도 함께 등용되어 총애받아 ‘진령군’이라는 호칭까지 얻게 된 것이다.

왕후가 진령군을 옆에 두고 그 조언을 신뢰함으로서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거의 복속되는 형국을 띄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려울 때 달게 들어오는 말들에 현혹되고, 이어지는 감언이설에 자의와 판단이 흐려지는 것만으로, 한 나라의 주권이 위협받는다는 교훈을 몸소 보여준 국모이야기가 있음에도, 현재에도 이런 재난이 반복되고 있는 실정이 아쉬울 뿐이다.

허나 이것은 그 누구에게든 해당하는 주의사항이다. 최대 나라가 휘청이고 최소 그대 한사람이라는 단위의 세상이 흔들리게 하는 것이 ‘주변’, ‘옆자리’의 힘이다.

의지하되 의존하지 말라

‘젊다’는 뜻은 다르게 보면 순수했던 시절에서 갓 탈피한 개념으로 봐도 좋지 싶다.

아직은 이해와 계산이 아닌 동심에 가까웠던 관계들로 주변이 채워져 있던 시기를 지나, 서서히 사회에 스며들며 비즈니스적 인맥이 옆자리를 채워나가는 시기.

더 이상 부모의 지원도, 대학 레포트 모임처럼 묻어가기가 통하지 않는 사회생활의 시작점에서 ‘주변’이라는 옵션을 활용하는 원동력은 자신의 ‘자존감’이다.

내 주변을 서포트로서 ‘의지’하면서 직접 성취감을 얻느냐, 자신의 부족함을 아예 주변에 ‘의존’함으로서 한시적인 무마로서 버텨나가느냐, 이 행로에 청춘을 넘어 인생의 행방이, 주변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상적인 주변은 절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채워나가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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