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이룬 것을 ‘성공’이라 한다. 그 과정에서 무리나 갈등이 없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열악한 환경을 뛰어넘는 성공을 ‘인간승리’로까지 회자하는 이유는 그만큼 성공이란 개념 자체가 희귀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례는 어찌 보는가? 고난을 넘지 못한 채 멈춘 사례들은 성공이 아니기에 실패한 인생이라 규정해야 할까?

황태도, 먹태도, 기본은 ‘명태’

‘명태’라는 어류가 있다. 이 어류는 새끼 때는 ‘노가리’로부터 시작해서 계절, 잡는 법, 관리법 등에 따라 수많은 명칭으로 바뀐다.

그중에서도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황금빛으로 건조시킨 ‘황태’를 으뜸으로 치는데, 그 건조과정에 있어 너무 얼거나 더워도 바로 실패하니, 이른바 ‘황태의 맛은 하늘이 내린다’고도 얘기한다.

그럼 황태를 만들다 실패한 것들은 그저 실패작에 땡처리일까? No. 날이 일찍 풀려 실패한 것은 먹태로, 너무 추워서 얼어붙은 석은 백태로, 제 나름대로 이름을 부여받고 충분히 선호하는 음식으로서 제 몫을 한다.

결국 ‘새끼노가리’이자 ‘명태’란 공통 근원에서 출발해 전부 황태가 될 순 없어도 실패한 그대로도 명칭을 얻고 가치를 인정받는다.

성공과 실패의 시작은 동일선상인데, 안착점이 다를지언정 그 나름대로 서로 결과물로 어우러진 것이 각자의 인생이자, 사회인 것이다.

성공의 기준에 생긴 변명 ‘수저’

‘공부 잘 해야 성공한다’는 어른들의 말에 10대 끝자락을 수능지옥으로 보내고, 학벌이라는 사회기준에 맞춰 스타트를 끊는 게 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또 정신 차려보면 어느덧 학벌보단 ‘취업’이 곧 능력인 사회로 바뀌어있는 현실과 마주한다.

결국 오롯이 ‘공부’가 신분상승과 재산을 안겨준다는 예전의 막연한 논리가 통하지 않는 이 시대. 너도나도 어렵다 보니 노력의 대가로 얻는 ‘성공’이라는 배경에는 근본과 태생이라는 ‘숟가락’이 변명처럼 얹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반영한 ‘금수저’나 ‘흙수저’란 말이 나오게 된 이유다. 앞서 얘기한 황태에게 부여된 햇살과 추위로서 얻어진 ‘황금빛’이, 낚을 때부터 이미 황금빛을 띄웠다는 이론이다. 똑같은 하늘의 계시이나, 너무나도 다른 동음이의어의 ‘천운’이라 하여 ‘금수저’라 하나보다.

타고난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얘기하는 걸 반박하긴 쉽지 않지만, 그 자체로 이미 인생을 ‘성공 혹은 실패다’라고 하는 데는 부정하는 바다.

그저 출발선상이 다른 것일 뿐 배경이 성패의 기준을 결정지을 순 없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궈낸 성공이 배경을 앞세운 타인의 성공보다 절대 부족하다 볼 순 없음이다. 결국 똑같이 밥 먹고 사는데 쓰는 ‘도구성질’의 차이 정도 뿐이란 말이다.

애초에 실패란 없다. 남들과 다른 성공일 뿐

인생에 성공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타고난 것도, 비교도, 변명도 필요치 않다.

스스로가 어떤 노력을 했고 그 노력으로 수확해낸 결과에 만족과 보람을 느낀다면 이 또한 성공이다. 설령 다른 이들이 나의 성공에 대해 ‘실패’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게만 부끄럽지 않다면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계에 봉착했을 때 ‘여기까지인가 vs 이만큼 했다’ 하며 받아들이는 자세의 차이가 실패마저 성공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하나의 성공사례 뒤에는 몇백의 실패가 그림자처럼 놓이게 된다. 하지만 작은 실패 하나하나를 ‘끝’이라 여기면 완벽한 실패요, 실패 또한 성공이라 여기며 다음 단계로 향한다면 과정에 불과하다.

실패란 그림자는 빛을 받아 커지며, 그 앞의 성공 또한 더욱 키우게 마련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내 몫의 성공이 그림자의 경계를 넘어 빛나는 곳에 다다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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