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문제 중 하나는 남녀, 세대, 종교, 인종, 소득계층간 대립이 심화되는 점에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 시대 청춘들은 중장년, 노년층과의 세대차이로 인한 ‘불통’의 갈증에 시달린다.

세대차이와 갈등은 서로 겪은 젊음의 배경이 다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데서 해결되곤 했다.
헌데 이제는 일자리, 주거문제, 복지정책에서 새대간 경쟁이 벌어지며 서로 필요이상의 상처를 주고받는 지경이 되고 있다. 
최근 생겨난 ‘아재개그·아재패션’이란 말은 그나마 차이를 인정한데서 진일보했다고 평가해야 할까? 이 또한 ‘다름’을 가지고 또 다시 선을 긋는 것은 아닐는지 웃픈 해학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인격’으로서 ‘자격’을 인정받자

윗사람들 눈에 요즘 청춘의 아우성은 그저 투정으로 보일수도 있다. 배고픔이 만연한 과거 청춘의 시기를 지나온 선배로서의 자부심이 바탕이 된 탓에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춘들에게 ‘다 견뎌내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배재된 강요에 다름없다. 여기에서 불통이 시작된다. 모든 인간교류의 갈등이 서로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되듯.
차이를 이해하지 않고 ‘넌 못한다, 나약하다’ 비판하기 일쑤인 어른과 청년 사이에는 이미 커다란 벽이 생겨났다. 또 청춘의 반항심은 끝내 그 단어대로 날선 ‘못’이 되어 그 벽에 ‘꼰대’라 스크래치를 남긴 채 대치한다. 
가장 적합한 해결법은 말로는 쉽지만 해내기는 어려운, ‘진정한 소통’이다. 소통이란 단순한 의견제시가 아닌, 그 의미에 담긴 ‘나’에 대한 어필이자 ‘인격’을 보이는 것이다. 
청춘도 마찬가지. 색안경에 같은 색안경으로 맞선들, 둘 다 장님이 될 뿐이다.
나라는 자아가 미숙한 구성이 아님을, 서로의 교류에 전혀 문제가 없는 인격체라는 점을 밝히고 소개해보라. 그 틈에 생긴 장벽은 서로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허물어질 것이다.
 
청춘, ‘과격’하되 ‘반격’하지 말라

어른들의 과거는 바로 ‘젊은 그대’이다. 
청춘=젊음, 어감으로는 한없이 찬란하지만, 현실적으론 아직 불안한 사회막내에 불과하다. 어수룩한 듯 거침없고, 불안한 듯 직선적이다. 가진 것 보단 가져야 할 게 많기에 ‘과격’할 수 있는 그 찬란한 시절이, 설마 우리의 윗대라고 없었겠는가. 
그들 역시 젊음이라는 과격함에 몸을 맡긴 채 ‘미숙’과 ‘오류’를 범했을 것이다. 또 그 경험들로써 ‘능숙’과 ‘여유’를 얻고, 그대에게 조언할 만한 ‘품격’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어른’이라는 기호에 속하는 그들은 소위 ‘꼰대’라는 범주의 캐릭터에 머물러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청춘들이 그들에 대해 ‘If’를 던지며 쉽사리 반격하지 않았으면 한다.
쉽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항상 조심스럽고, 사사건건 예민하게 문젯거리를 찾는 듯 보여도 그 만큼 단련됐고, 효율적이며,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이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단언컨대, 이 또한 미래의 우리 모습일 수 있고, 더할 수도 있다. 
그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할수록 훗날 그대의 후배들은 더욱 그대를 힘들게 할 것이다. 젊은 그대가 과격할 수 있는 용기로 윗세대를 포용하는 능력 또한 갖춰주길 희망한다.
열정을 동반한 존중과 이해, 미래를 향하는 청춘으로서 갖춰야 할 마지막 ‘자격’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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