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린트 인수 4년 전 '오판' 뒤집을까

"어느새 이렇게 늙어 버리다니..."

지난 5월 비행기 화장실 안에서 한 사내가 볼일을 본 뒤 거울을 보며 탄식했다. "정말 나는 이제 끝난건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60세가 되는 내년 8월 11일에 구글 출신인 니케시 아로라 부사장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은퇴 시기가 다가오자 4년 전의 후회가 밀려왔다. 사업가로 이름을 올렸다면 세계 제일을 목표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이 입버릇처럼 해온 말이 자꾸 떠올랐다.

손 회장은 1981년 컴퓨터 소프트웨어 도매사업을 시작으로 대형 M&A(인수합병)를 반복하며 회사를 키웠다. 때론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비판도 받았다. M&A를 통한 사업 재편 과정에서 과감하게 본업을 버리는 일도 마다지 않았다. 그가 '이단아'라고 불리게 된 이유다.

손 회장은 1996년 야후와 손잡고 '야후재팬'을 설립하며 인터넷 사업에 진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방송에도 처음 손을 뻗었다. 2000년 금융업에 나선 데 이어 2006년에는 영국 보다폰 일본법인에 1조7500억엔(약 18조6580억원)을 투자해 이동통신사업을 시작했다. 이후에도 전력(2011년), 로봇(2015년) 등 새로운 영역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소프트뱅크는 일본에서 시가총액이 3번째로 큰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인 토요타와 일본 최대 은행인 미쓰비시도쿄UFJ 다음으로 몸값이 비싼 기업이다. 지난해 5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꼽은 글로벌 2000대 기업 중에는 62번째로 꼽혔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5일 손 회장의 일화와 소프트뱅크의 성장 과정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손 회장이 구불구불한 길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1등'이 되는 길의 입구를 찾아냈다고 지적했다.

손 회장은 그러나 4년 전인 2012년에 결정적인 선택의 기로에 섰다. 휴대폰이냐, 그 다음이냐를 두고 그는 고민에 빠졌다.

손 회장은 모든 물건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시장의 잠재력을 오래 전부터 눈여겨 봐왔다. IoT의 두뇌인 반도체를 설계하는 영국 ARM홀딩스의 존재에 주목하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손 회장은 재무부서에 언제든 움직일 준비를 해두라는 극비지령을 내려뒀다.

장고를 거듭한 손 회장은 끝내 휴대폰을 선택했다. 이듬해 미국 3위 이통사 스프린트넥스텔을 216억달러(약 24조5720억원)에 인수했다. 2014년엔 미국 4위 이통사 T모바일까지 손에 넣으려다 미국 정부의 반발로 실패했다.

손 회장은 당시 "눈높이를 더 높이지 못했다"며 안정적인 현상을 유지하려고 도망쳤다고 회고했다. 소프트뱅크는 결국 스프린트 인수로 막대한 손실을 봤다. 일본 이동통신시장에선 만년 3위에 머물렀고 미국에서는 순위가 4위로 추락했다.

사카모토 료마

일본 도쿄 시오도메의 소프트뱅크 본사 26층 대회의실에는 손 회장이 존경하는 사카모토 료마(일본 근대화를 이끈 에도시대 무사)의 사진이 있다. 손 회장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이 곳에서 죽도를 휘두른다고 한다. 

죽도를 손에 든 모습이 잦았던 손 회장은 마침내 지난달 초에 결심을 굳혔다. 비행기 화장실에서 내쉰 한숨을 날려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동통신에서는 압도적인 1등이 될 수 없다... 그때 도망친 걸 회복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손 회장은 곧 아로라 부사장에게 은퇴 철회 의사를 밝혔다. 바로 그 다음주인 6월 말엔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집으로 사이먼 시가스 ARM홀딩스 CEO(최고경영자)를 초대해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밀어붙였다. 1주일 뒤인 지난 4일 터키 남부 항구도시의 한 레스토랑에서 손 회장과 시가스 CEO가 재회했다. 인수 협상이 사실상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소프트뱅크는 지난 18일 ARM홀딩스를 243억파운드(약 36조2400억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손 회장은 이번 거래를 바둑 한 수에 비유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그의 도박이 과연 성공할지 두고 볼 일이다.

저작권자 © 비즈니스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