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참 좋은 시간이다.

‘조언’이라는 것에 대해 조언하고자 한다. 이제는 멘토링 이라는 그럴듯한 워딩(wording)으로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되어버린, 바로 그것이다. 내 생각에 현재의 청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조언을 받는 측면에 있어서 풍요로운 환경에 있으면서도 전혀 멘토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청춘의 탓이 아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유명한 멘토들이 제대로 된 멘토가 아니라 인기에 영합한 유명인들이라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멘토링에는 의미가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이번 칼럼에서 청춘이라면 가져야 할 ‘조언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이 조언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당신은 조언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얼마 전 한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아무 탈 없이 그냥 취직해 잘 살아오는 것처럼 보이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여행을 간단다. 왜냐고 물어보니, 주변에 비슷한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간 선배가 돌아와서 자기 사업을 하는데 잘 된다며 멘토링을 해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사업을 절대 할 수 있는 성향의 친구가 아닌데, 그는 똑같은 루트를 밟으려고 했다. 나는 말렸다. 그 선배와 친구의 삶은 대충 들어봐도 완전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에게 “남의 삶이 더 멋져 보이는 건 너 스스로 무엇이 너의 삶에서 행복한 일인지 스스로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별 볼일 없는 나에게도 조언을 구하고자 후배나 주변 지인들이 많이 찾아온다. 이메일이나 전화로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대학원 진학 문제, 직장 내 상사 고민, 연애, 심지어 집안 문제 등 그 내용도 다양하다. 조언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으로부터 듣는 같은 이야기도 그 사람이 마음을 여는 정도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한 사람이 토로한 한 가지 문제를 일회성이 아니라 여러 번 들어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로만 조언을 해준다. 때론 말로 조언하기보다는 차라리 밥 한 끼 함께 하며 조용히 응원해주기도 한다. 스스로 깨우치고 해결할 능력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조언에 들인 시간적, 정신적, 물질적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바라는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최선의 선택을 해서 행복하다는 즐거운 소식을 듣는 것뿐이다. 앞서 언급한 친구도 그 선배의 조언을 잘 흡수해서 결과적으로 좋은 조언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경우는 사실 생각보다 잘 없다. 왜 그럴까?

직접적인 조언이 오히려 조언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사 결정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수만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조언해주면서, 조언을 받은 이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워하는 것에 한 가지 공통 분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외로 각자가 인생을 대하는 자기 통제 경험 (Experiential Locus of Control)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인지심리학에서 주로 설명되는 이 개념은, 내가 학문한 인간과 컴퓨터 상호작용 (Human-Computer Interaction) 분야에서 대상에 대한 인간 경험의 측면으로 확장한 개념이다. 쉽게 말해 “내가 경험하는 것은 누구에게 통제권이 있는가?” 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의외로 자기가 겪고 있고, 또 겪어야 할 경험에 대해 스스로 통제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이 외재적인 요인에 있다고 인식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은 시대적 환경이 실제 그러한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가 대부분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라고 여기며 문제 해결에 대한 행동을 망설이거나 힘들어한다. 즉, 상기 개념으로 설명하면 자기 통제권을 외재적 (External) 요인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청춘의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문제가 생각보다는 정말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경우가 꽤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문제들은 각자의 삶에서 아주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행복 요소인 경우가 많다. 특히 대부분은 자기 의지와 배반 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렇다.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걸 하지 못하거나 타인에 의해 제약받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걸 (혹은, 자기가 원하는 걸 했을 때 얼마나 행복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음에도 우매한 회피, 혹은 그릇된 다짐을 한다. 그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었는지는 삶을 살면서 아주 ‘서서히’ 깨닫는다.

이 때 사람들이 조언을 들으려고 한다. 멘토를 찾아가고 멘토링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한다. 청춘들 가운데는 멘토링 프로그램 중독자(?)도 있다. 좋은 말, 감명 깊은 이야기를 찾아 강연이나 세미나를 찾아 다니는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멘토링을 받은 한 후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모르겠어요.” 어떤 후배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결국 능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같다는 생각만 더 들었어요.” 앞서 언급한 친구는 결국 회사를 그만 두고 여행을 선택했는데, 부디 이런 앞으로 이런 말은 안했으면 좋겠다. “아, 차라리 회사에 계속 남아 있을걸...”

멘토의 문제가 아니라, 조언을 받아들이는 청춘의 문제이다.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문자 그대로) 어른은 항상 과거를 반추해 조언을 하게 된다. 요즘 나오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이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어른도 자신이 그렇게 될 줄 모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진리가 담겨 있는 과거의 경험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경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어렵다. 조언을 듣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경험이 없고 본질을 몰라서 조언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멘토들도 자기 경험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따라서 방법론적인 측면에 가까운 경험 중심의 조언을 청춘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했을 때 그 결과가 좋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구체적인 조언이 필요 없는 이유이다. 각자의 삶이 다르지 않은가?

나의 삶의 경험을 예로 한번 들어보겠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존경스러운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지만, 사춘기 시절 꽤나 반항심이 강했던 나였다. 나는 이 시기부터 꿈이 있었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만 했다. 바로 컴퓨터다. 부모님께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결정한 것은 자식 교육 때문이었는데, 정작 전학을 온 중학교 3학년 시절 지방에서 제대로 배워볼 수 없었던 컴퓨터를 배우겠다며 잘하던 학업을 팽개치고 컴퓨터에 매진했다.

부모님의 조언은 어릴 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나는 이 당시에도 내 삶이기에 부모님의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조언에도 컴퓨터 공부를 절대 놓지 않았다. 지금 내 삶을 대하는 것처럼 “나는 행복해야 해.” 라는 확고한 신념은 아니었어도, 최소한 그래야만 행복했고 그렇게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 이 행동이 빛을 발해 카이스트 영재 교육도 2년이나 받았고, 한미대표과학영재로 선발되어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관심사가 로봇으로 바뀌어 로봇 공학의 기초도 일찌감치 배웠다. 모든 행복은 나의 의지로 하고 싶은 걸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얻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재 교육을 받으면서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던 대전의 모 대학이 있었다. 다만 진학할 수 있는 학부에 제한을 걸어 뒀다. 나는 그 당시 선택한 학부가 마음에 안 들고 대전이 싫어 거의 바로 포기해버리는 과감한 결정을 했는데, 그 덕에 진학의 측면에서 큰 시련을 맞았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영재 교육과 스타트업으로 인해 고등학교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수적으로 재수를 해야만 했는데 3년의 고등학교 공부를 1~2년 만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대학원 생활 직전 마지막으로 갔던 배낭여행지 가운데, 오스트리아 할슈타트에서 직접 찍은 사진. 정말 그림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갔던 대학은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학 생활 1년을 방황하며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다가,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선택한 것은 여행이었다. 배낭여행을 참 많이 갔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행을 다녔는데, 지금도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경험들이었다. 여행을 통해 행복함과 자유로움을 느꼈고,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대해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대학원을 진학하기 직전에 한동안 마지막이 될 거라며 배낭 여행을 무작정 또 갔으니, 여행은 대학 생활의 처음과 끝이자 그 자체였다.

그렇게 대학을 마치고 석사, 박사 학위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보다 확고하게 가져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연구, 하고 싶은 활동을 하는 것을 기대했으나 대학이라는 공간은 제약이 정말 많았다. 지도 교수님 눈치도 봐야 하고 연구 주제도 펀딩이 없으면 불가능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 연구원 생활 1년 반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자존감이 떨어졌던 시기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함에 대한 경험은 나를 움츠러들게 하고, 실수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팀장이 되고 랩장이 되면서 나는 과거의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연구하는 것은 내 행복이었고 즐거움이었다. 팀원들과 함께 협업하는 것은 보람이 있었고, 하기 싫었던 일들도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명분으로 주어진 감투 아래에서 나름의 명분을 찾아 행복하게 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밥 시간을 자주 놓쳐 후배 연구원들의 원성을 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이가 들면서 나에게 들어오는 제약이 더욱 다양해졌다. 제약이 나의 결정을 강요해올 때마다 한 가지 기준을 세웠다. 그것은 ‘나의 행복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그 제약이 특히 책임감이라면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한다면 책임감은 갖고 싶었고, 또 책임감을 다 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하기 싫음’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 고민했다.

예를 들어 여행은 내가 심적으로 힘들어 하고 싶은 일에도 의욕을 발휘하지 못할 때 생각의 질을 윤택하게 해주는 좋은 보상이다. 사랑도 일을 하면서 물리적이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 행복함을 주는 좋은 보상이다. (물론 사랑에는 그 자체로 책임감이 따라야 하지만.) 물론 가족의 존재도 그러했고,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여유 시간을 갖는 것 역시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좋은 보상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기 싫을 수 있는’, 그러나 해야 하는 책임감이나 처한 환경에 대한 대체적 보상이다.

나의 삶에 대한 경험이 어떠한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기에 특별한 조언을 하지 않고, 내 경험과 생각만 늘어놨다. 누군가에겐 이 자체가 조언이 되었던 내용들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도움이 되었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내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결국 모든 행복은 내가 경험하는 것에 자기 통제권을 가졌을 때 이루어졌다는 것을 조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게 내가 경험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조언하고자 하는 본질이다. 내 경험을 소개함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본질의 측면에서 이 글을 읽는 청춘들에게 생각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조언을 좇아 다니는 청춘들에게 말하고 싶다.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행복이 위협을 받는데, 조언을 받으면서도 벗어날 줄을 모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언의 본질을 파악하고, 스스로에게 맞게 조언해보라. 즉, 실제 행동해야 한다. 갖고 있는 문제가 삶에 있어 행복의 전부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약 문제가 행복의 구성요소 중 하나라면 다른 요소들로 충분히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에는 문제가 되었던 것조차 행복감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환경으로 스스로도 모르게 바꾸어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하기 싫은 일에 대한 맷집’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청춘일 때 조언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조언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이게 안 된다. 나름대로 기준이 뚜렷해진 나이에 문제가 발생하면, 조언을 들어도 겸허히 받아들여 스스로 조언하기보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 바쁘다. 심리적으로 이것은 어른이어서 맷집이 강해졌거나 논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이 외재적인 요인에 있다고 판단하고 방어적으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혹자는 이를 신중하다고 말하지만.). 따라서 누구나 나이를 먹어가는 만큼, 청춘일 때 조언을 받아들이고 스스로에게 조언(즉, 행동)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은 스스로 가져야…

조언을 받아들이는 연습은 곧 앞서 언급한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내재적(Internal) 요인에 있다고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조언을 통해 청춘은 자신이 처한 문제가 스스로에게 있다는 점을 깨닫고, 해결 방안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동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자기 통제권을 내재화했을 때 가능해진다. 나의 결정, 나의 선택, 남이 아닌 나 스스로를 통한 행복 추구를 하겠다는 판단은 조언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확고해진다.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의 주장에 따르면 자기 통제는 근육과 비슷하다고 한다. 자기 통제권을 내재화하는 일은 반복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조언을 듣고만 앉아 있으면 (비유하자면, 운동이 다이어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면) 절대 그 조언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결국 내재화의 문제이다. 생각보다 청춘이 맞이하는 문제는 그 내용에 전혀 관계없이 스스로가 해결하면 되는 것들이 많다. 조언을 대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기 통제권이 외재적이면 타인이 원하고 타인이 추구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한 번뿐인 삶에서 얼마나 슬픈 일인가?

우리는 항상 두 마리 토끼의 딜레마에 빠진다. 다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조언’을 하는 나 역시 선택과 행동의 측면에서 자기 통제권을 잃어버렸던 때가 있었고, 그 때의 괴로운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하다. 지금은 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대부분 자기 통제권을 내가 갖고 있다는 믿음 하에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힘들고 피곤해도 즐겁다.

다른 청춘들도 각자 삶에 대한 자기 통제권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장한다. 새벽 4시 반이 다되어가는, 이 글을 쓰는 나는 피곤하지만 이 칼럼의 자기 통제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에 즐거웠다. 데드라인도, 주제의 범위도 제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조언을 스스로에 대한 조언으로 바꾸고, 그 조언을 통해 삶에 있어 자기 통제권을 스스로가 가질 수 있도록 힘을 기르자. 나는 헬조선이라 불리는 현재의 환경은, 그래도 과거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는다. 청춘이 지금 가꾸어 가는 삶의 디자인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설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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