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들 예상 빗나간 저성장·저인플레·저금리

"경제학자들이 10년 내내 헛다리만 짚었다(Economists Got the Decade All Wrong)."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2010년대를 정리하며 쓴 특집기사 가운데 하나에 붙인 제목이다. 내로라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2010년대 내내 경기를 오판하더니, 이제서야 그 이유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고 신문은 꼬집었다.

2010년대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시작됐다. 2008년 미국 리먼브러더스 붕괴 사태로 본격화한 금융위기는 이듬해 '대침체(Great Recession)'가 끝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대침체가 막 끝난 2009년 가을 미국 기준금리는 0~0.25%, 실질금리는 0.1%로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경제전문가들은 당시 경기회복세가 더디더라도 2015년에는 금리가 4.2%로 꼭짓점에 도달할 것으로 봤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사진=연합뉴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대침체 이후에도 유례없는 '제로(0)금리' 정책을 고수했다. 2015년 12월에야 금융위기 이후 첫 금리인상에 나섰다. 연준은 이때부터 지난해 말까지 기준금리를 9번 올렸지만, 올해 다시 세 차례 인하했다. 현재 기준금리는 1.50~175%. 시중금리 기준인 10년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금리)은 1.8%에 불과하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실질금리는 0%에 가깝다. 먼 길을 돌아 사실상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들이 몇 년은 고사하고 불과 몇 개월 뒤 금리 향방조차 제대로 점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WSJ는 '연준 탓'으로 돌리는 것 이상의 이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경제가 왜 1940년대 이후 경기확장기 가운데 가장 더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물가상승률은 연준의 목표치인 2%를 계속 밑돌고 있는지, 그럼에도 연준은 저금리 기조를 고집하고 있는지 등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미국 경제는 역대 가장 긴 경기확장세를 뽐내고 있고 주식시장이 랠리를 펼치고 있으며, 실업률은 반 세기 만에 가장 낮은 이유도 이코노미스트들이 해명해야 할 난제다.

#부채 후유증(debt hangover)

미국 하버드대의 카르멘 라인하트, 케네스 로고프 교수를 통해 유명해진 이론이다. 이들은 2009년 금융위기의 역사를 해설한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 Eight Centuries of Financial Folly)'라는 제목의 공저를 내 의외의 인기를 끌었다.

라인하트와 로고프는 8세기에 걸쳐 66개국이 겪은 금융위기 사례를 분석해 금융위기 국면에서는 가계와 은행, 기업, 때로는 정부조차 기존 채무 상환에 집착하며, 또 다른 위기에 대한 우려로 차입과 투자를 피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결과 성장률, 물가상승률, 금리가 억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한동안 그럴싸하게 여겨졌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풀 꺾이는가 싶더니, 유럽에서 재정위기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저성장, 저인플레이션, 저금기 기조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WSJ는 지적했다.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 Eight Centuries of Financial Folly)' 표지<사진=미국 프린스턴대 출판부 웹사이트 캡처>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2013년 대안으로 '구조적 장기침체' 이론을 제시했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하버드대 경제학자 알빈 한센이 도입한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한센은 대공황에 의한 저성장과 높은 실업률이 장기화하게 된 배경으로 인구 증가세 둔화에 따른 투자 부진을 문제삼았다. 일할 사람과 소비자가 줄고, 특히 인구 고령화로 주택 구입 같은 고액 소비가 위축되면서 기업의 투자도 후퇴하게 됐다는 얘기다.

서머스는 인구 증가세 둔화가 성장률과 금리를 압박한다는 한센의 논리에 소셜미디어 기업 등 급성장하는 첨단기업들의 투자 부진, 소득불평등 등의 요인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 성장정체가 만성이 되면서 가계와 기업이 소비와 투자를 꺼려 생산성이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서머스의 장기침체 이론은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최근 세계 경제에 '일본화(Japanification)' 바람이 불면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일본이 겪은 장기불황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서다.

장기침체는 경제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우선 금리가 제로에 가까워지면 중앙은행의 경기침체 대응력이 약해진다. 필요할 때 금리를 더 낮추기 어려워서다. 침체 공포에 움츠러든 민간 부문이 차입을 줄이면 정부는 급격한 금리 상승 걱정 없이 재정적자를 키울 수 있다. 문제는 중앙은행의 도움 없이 경기를 부양하려면 재정적자를 계속 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같은 이유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중은 주요국 가운데 최고인 240% 가까이 치솟았다.

아울러 장기침체는 보호무역을 자극한다. 내수가 부족한 나라는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야 한다. 자국 통화를 평가절하하거나 관세를 높여야 한다는 유혹을 받기 쉽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미국 금융시장 분위기나 경제지표의 흐름은 서머스의 구조적 장기침체 이론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2009년 3월 강세로 돌아선 뉴욕증시는 역대 최장기 랠리를 펼치고 있고, 2009년 10%에 달했던 미국 실업률은 현재 3.5%로 5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 중이다.

일본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추이(단위: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자연실업률(natural rate of unemployment)

자연실업률은 노동자 부족이나 인플레이션 가속을 유발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실업률을 의미한다. 임금과 물가를 높이기에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이라는 뜻에서 '골디락스 실업률'이라고도 한다. '골디락스'는 영국 전래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에서 따온 말로 곰이 끓인 세 가지의 수프 가운데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수프를 말한다.

때문에 실제 실업률이 자연실업률을 크게 웃돌면 경기침체, 자연실업률에 한참 못 미치면 인플레이션이나 경기과열의 신호로 해석한다.

미국 경제를 둘러싼 난제를 자연실업률로 설명하는 이들은 미국의 자연실업률이 지금까지 생각해온 것보다 훨씬 낮다고 주장한다. 실업률 정상화의 길이 당초 예상보다 더 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WSJ는 경기회복이 더 이뤄져야 할 부분이 많았다는 의미로, 미국 경제가 지난 10년 동안 상당기간 제 능력을 밑돌았던 셈이라고 설명했다. 

얀 해지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이유로 미국의 인플레이션과 금리 동향에 별다른 수수께끼는 애초에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깊은 구멍에 떨어져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마침내 구멍에서 올라왔는지 몰라도, 유럽이 빠져나올 때까지 금리는 계속 낮은 수준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해지우스는 또 경기순환의 관점에서 경제가 정상화할 때까지 지난 10년간의 경기흐름이 구조적인 것인지, 경기순환적인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WSJ는 지난 10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면 10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고 거들었다.

미국 실업률 추이(단위: %)<자료=트레이딩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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