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진=연합뉴스>

같이 놀면 물든다고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꼭 그렇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숱하게 만나며 '브로맨스'를 과시하더니 트럼프가 아베인지, 아베가 트럼프인지 헷갈리는 상황이 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글로벌 뷰'(Global View) 칼럼을 쓰는 월터 러셀 미드도 지난 1일 낸 글에서 아베의 트럼프화(Trumpification)를 꼬집었다. 그는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두 사건이 '세계 정치의 트럼프화'를 방증하는지 모른다고 봤다. 일본이 국제포경위원회(IWC)에서 공식 탈퇴해 31년 만에 상업용 고래잡이를 재개한 것과 한국에 대한 반도체 필수 소재 수출을 제한한 걸 두고 한 말이다.

일본의 고래잡이 재개는 명분이 뚜렷하지 않다. 일본에서 고래 고기 수요가 줄어 경제적 이익이 예전만 못해졌기 때문이다. 미드는 일본이 굳이 상업 포경을 재개하기로 한 건 국가적 자존심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일본의 일탈이 캐나다와 노르웨이 등 다른 포경 지지국들의 탈선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다른 많은 국제기구들을 IWC와 같은 위기로 몰아넣었다. 일방적인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막무가내 행보 탓이다. 트럼프의 도발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WTO) 등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주도한 국제기구들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한 것도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와 닮은 꼴이다. 일본의 조치가 보호무역에 대한 보복이 아닌 정치적 결단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무역전쟁의 본질이 패권싸움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드는 일본이 세계적인 교역국이기는 하지만, 미국과 같은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더욱이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줄곧 규칙을 기반으로 하는 다자주의, 자유무역 체제를 옹호해왔다. 일본이 트럼프의 미국처럼 무역에 정치를 결부시키는 결단을 내린 건 국가전략의 극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올 만 하다. 

미드는 일본의 이같은 결단은 기존 국제 질서가 계속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라며, 일본이 계속 트럼프의 방식으로 자국 이익 극대화를 꾀할 게 자명해 보인다고 썼다. 일본의 관점에서 '트럼프 시대'는 막간이 아니라 '혼돈의 세계'로 가는 이행기라는 것이다.

WSJ의 시장 담당 수석 칼럼니스트인 제임스 매킨토시는 유럽연합(EU)이 최근 비회원국인 스위스에 인정했던 동등지위를 박탈하자 스위스가 자국 기업 주식의 EU 내 거래 금지 조치를 취한 것도 무역을 정치의 협상카드로 쓴 경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반무역 공세와 비슷한 일련의 사례는 다자협상을 기초로 한 국제적인 규칙이 양자합의로 전환되고 있는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선호하는 양자협상에서는 힘이 센 쪽이 유리한 조건을 요구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이라는 책에서 "영향력은 상대가 원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더 좋다. 그것이 없으면 꼼짝 못하는 것이라면 최상"이라고 썼다. 트럼프가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의 미국 기술 접근을 막은 것이나, 일본이 한국 반도체산업의 필수 소재 수출을 규제하고 나선 것처럼 말이다. 

매킨토시는 세계 역사에서 정치가 경제에서 분리된 기간은 지극히 짧다고 지적했다. 기껏해야 미국과 EU가 쿠바에 대한 무역 분쟁을 끝낸 1990년 말 이후라는 것이다. 그는 힘이 무역을 좌우하게 되면 기업들은 글로벌 공급망에 더 이상 의존할 수 없게 돼 막대한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승자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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