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사진:연합뉴스

 

"금융통화위원회는 정부 압박이 있다고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본연의 책무에 맞게 의사결정을 했고 다른 결정요인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최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2015년 3월 정부의 압박을 받고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린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한 이주열 한은 총재의 답변입니다.

국정감사를 하루 앞둔 지난 21일 KBS는 박근혜 정권에서 언론까지 동원한 압박을 이기지 못해 한은이 기준금리를 인하했다는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보도내용에 따르면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직전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찬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이 문제를 사전 모의한 게 안 수석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 남아있습니다.

정 부위원장은 안 수석에게 "강효상 선배(조선일보 편집국장)와 논의했고 기획 기사로 세게 도와주기로 했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조선일보는 2015년 3월2일과 3일 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한은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정 부위원장은 안 수석에게 "조선이 약속대로 도와줬으니 한은이 금리를 0.5%포인트 내리도록 말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다시 보냈습니다.

한은은 며칠 뒤 열린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고 석 달 후 0.25%포인트를 더 인하했습니다.

이주열 총재는 이런 내용을 보도를 보고 알았고 당시에 안 수석과 협의한 적도 없다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상 이주열 총재의 말보다는 정부의 압박을 받아 기준금리를 내렸다는 의혹이 더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2015년 3월 기준금리 인하에는 '전격', '깜짝'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둘 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나오는 말입니다. 당시 채권시장 관계자의 90% 이상은 금리가 동결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해외투자은행(IB)에서도 금리 인하를 예상하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은과 한은 밖에 있는 전문가들의 입장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대다수가 이해하기 힘든 결정을 한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은 의혹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점을 넓혀보면 한은의 기준금리 결정이 2015년 3월에만 시장과 어긋난 것은 아닙니다. 2016년 6월 인하 때도 기습적이란 평이 있었고 한은의 기준금리가 예상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지적은 박근혜 정부 내내 이어졌습니다.

기준금리 조정은 가계부채를 비롯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해 어느 쪽으로 갈지 신호가 있어야 시장에서도 대응이 되는 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금통위 직후 열리는 기자간담회에서도 신호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의와 그렇지 않다는 이주열 총재의 응답은 자주 연출됐습니다.

그러다 이주열 총재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소위 '양쪽 깜빡이'를 켰습니다.

당시에는 물가와 가계부채, 환율, 투자, 고용을 비롯한 국내 상황과 세계 경제까지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살펴야 할 변수들이 워낙 복잡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양쪽 깜빡이는 비상등이란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주열 총재가 본연의 임무에 맡는 결정을 뜻대로 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은이 발권력을 동원해서 구조조정을 지원하라던 정부의 압력에 맞서던 이주열 총재의 모습이 떠오르니 더욱더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밀실에서 기준금리를 움직이라는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얼마나 쉽게 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온전히 추측이지만 발권력 동원은 할 수 없겠다며 버틴 것은 기준금리까지는 어쩔 수 없었지만 더는 밀릴 수 없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물론 정부의 압박을 이기기 힘들었다는 게 경제 상황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전망에 따라 독립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명분은 될 수 없습니다. 한은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면 그게 무엇이든 비겁한 변명이고 핑계일 뿐입니다.

이주열 총재가 이런 행동을 했다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44년만에 연임 총재란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고 정부에 휘둘린 총재로 이름을 남기게 될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주열 총재가 본인보다 더 중요한 게 한은의 명예와 독립 그리고 나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사명감으로 일하고 있는 한은의 후배들이란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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