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기업 '주판알'…中·美·EU는 신규시장 선점?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달 19일 오후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에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부터), 이재웅 쏘카 대표, 구광모 LG 회장의 기념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9월 20일 오후 8시45분께 서울 종로구 경복궁 동편 주차장에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 차량이 도착했다. 평양을 다녀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 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용환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적지 않은 취재진이 몰렸다.

 이들의 방북으로 남북경협사업에 변화가 생길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선 "아직 구체적인 말씀을 드릴 단계는 아니다"(구광모 LG 회장), "여러가지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아직 백지 같은 상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최태원 SK 회장)는 발언이 나왔다.

 한 달이 지났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아직까진 이들 가운데 이렇다 할 구체적인 남북경협사업을 발표한 기업은 없다. 그 사이 '남북경협사업에 막연한 기대감은 경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사전에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해서 차분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재계 차원의 검토·연구도 진행 중이다. 실제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7일 지역상공회의소 회장들과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지린성 옌지와 훈춘, 랴오닝성 단둥 등 3개 지역 경제개발특구와 물류기지, 세관 등을 살펴봤다. 남북경협 재개 시 협력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북한 인근을 다시 방문한 것이다. 

■韓기업 '주판알'…北에 눈독 들이는 中·美·EU자본

 그러나 북한을 두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우리 기업들의 '실기(失期)'가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실제 일부 해외기업들은 대북투자를 염두에 둔 행보를 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에 기반을 둔 북한 전문 여행사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는 최근 '파이오니어스 코리아'란 대북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북한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잠재적 투자자와 기업가에게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라며 "개척자가 돼라"고 홍보하고 있다. 2008년 문을 연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는 북한 내 '단체여행', '자유여행' 등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코마 송환'으로 알려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도 이 여행사를 이용했다.

 영 파이오니어 투어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의 한 곡물업체도 최근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언론에 따르면 미국 글로벌 곡물·광물업체들이 낙후된 북한의 농업·광물 생산분야에 대한 환경조사 및 투자 가능성을 타진했다. 또한 발전설비, 농기계 분야 업체들도 방북을 추진 중이다. 

 유럽 투자자들도 관심이 높다. 네덜란드 투자 자문회사 GPI 컨설턴시의 폴 치아 대표는 지난 18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대북 투자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늘면서 올해 기자단 방북 프로그램을 한 차례 더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방북은 내달 10~17일이다.

 투자 가능성 등을 따져보는 '실사'를 위한 방북이다. 한 대북 전문가는 "아직 대북제재 완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북미 간 비핵화 협상과 북한의 이행과정 등을 통해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글로벌 기업들이 미래시장 선점 기회를 그냥 놓칠리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북한도 장단을 맞추는 모양새다. 미국 북한전문매체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북한이 최근 개설한 국제무역 웹사이트에 원산-금강산 간 철도 개선 사업과 원산 송도원 호텔 현대화 사업 등 대규모 투자 사업을 소개하고 있다. 대북제재 완화 이후 국면에 대한 대비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北, 시장으로 바라봐야"

 일각에선 정치권의 입김 탓에 기업들조차 북한을 오롯이 '시장'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자유한국당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연해주 산업단지 조성 관련 중소기업 수요조사, 개성공단 재개 시 입주기업 지원 관련 법률자문, 북한 경제특구 발전 방향 연구용역 등의 활동을 문제삼았다.

 지난 11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의 LH 국정감사에서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은 연해주 산단 조성과 관련한 의견이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민간위원으로부터 나왔다고 언급하면서 "청와대가 대북지원사업을 직접 챙기는 정황이 확인된 것"이라며 "우리 정부가 지금 너무 앞서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북 전문가들은 정치권의 이런 인식들이 기업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요인이라며 "북한의 문이 반드시 우리에게만 열려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북한 SOC 소요자금도 AIIB가 언급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지금은 북한을 철저히 시장으로 봐야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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