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파산한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 뉴욕 본사. <사진=EPA·연합뉴스>

2008년 9월 15일,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이른바 ‘리먼쇼크’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리먼쇼크에 글로벌 금융시장은 패닉에 빠졌고, 세계 경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대침체’에 직면했다.

리먼쇼크가 일어난 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나온다. 10년 전과 다름없는 위기의 불씨가 여전히 세계 경제와 금융시장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형 금융위기가 10년마다 반복된다는 ‘10년 주기설’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제임스 매킨토시 월스트리트저널(WSJ) 칼럼니스트는 최근 쓴 글에서 리먼쇼크가 남긴 중요한 교훈 중 상당수가 아직 간과되고 있다며, 되새겨야 할 교훈 5가지를 꼽았다.

1. 거품지표, 하나만 보면 안 된다.

자산시장의 ‘버블’(거품) 하면, 가격 수준(밸류에이션)의 폭등을 생각하기 쉽다. 2008년만 해도 2000년 터진 '닷컴버블'의 기억이 선명했다. 뉴욕증시 기술주 대표지수인 나스닥은 인터넷 투자열풍이 한창이던 1995~2000년 400% 넘게 폭등했다. 나스닥지수의 주가 수준을 반영하는 주가수익비율(PER)이 한창 때 200배에 달했다. 1991년 일본 자산시장의 거품이 절정이었을 때 닛케이225지수의 PER이 80배였으니, 엄청난 거품이었다. 이에 비하면 리먼쇼크 직전 주가 수준은 걱정할 게 아니었다.

문제는 리먼쇼크를 촉발한 거품이 주가가 아닌 신용에 쌓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 부동산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생긴 신용거품이 문제였다. 당시 금융권은 신용등급이 바닥인 이들에게까지 주택담보대출을 남발했다. 금융위기의 발단이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가 여기서 비롯됐다.

PER만 보며 거품 위험을 간과했던 이들은 충격에 빠졌다. PER은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수치인데, 당시에는 주가뿐 아니라 주당순이익이 함께 뛰면서 PER의 상승이 제한됐다.

최근 미국 증시의 PER은 리먼쇼크 이전인 2007년 정점 수준을 웃돌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친성장 정책으로 기업들의 실적(주당순이익)도 역대 최고 수준이다. 금융위기 전처럼 PER만으로는 거품 위험을 감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기업들의 실적이 계속 좋으면 문제될 게 없지만, 실적의 질을 평가하는 지표들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기업들의 차입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다.

2. 위기 땐 유동성이 사라진다.

최근 많은 투자자들이 회사채 등을 거래하기 어려워진 게 위기의 전조일 수 있다고 우려한다. 10년 전에도 성행하던 회사채 거래가 갑자기 끊겼다. 수년간 이어진 호황에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직접 국채를 거래하던 대형은행들은 2850억달러에 이르는 물량을 쌓아두고 있었다. 덕분에 채권시장엔 유동성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대형은행들이 위기감에 매도 포지션으로 돌아서자 유동성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 여파로 고위험·고수익 매력을 뽐내던 ‘정크본드’(투자부적격등급 채권)의 수익률(금리)이 23%로 치솟았다. 정크본드 가격이 폭락했다는 말이다. 다른 고위험·고수익 파생상품들도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 정크본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근까지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한 자산 가운데 하나다.

3. 고요가 길면 후폭풍도 거세다.

미국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의 이름을 딴 ‘민스키 모멘트’는 투기와 과도한 신용이 자산 가치를 부풀려 만든 거품이 끝내 터지는 순간을 말한다. 민스키에 따르면 경제성장이 장기화하면 시장의 자만심이 커져 부채가 늘어난다. 부채는 한동안 자산가격을 띄어 올리며 경제성장을 뒷받침하지만, 한계에 도달하면 자산가격이 폭락하고 경제는 심각한 침체에 빠진다.

민스키 모멘트가 임박한 한계상황에서 조달하는 부채를 ‘폰지부채’(ponzi debt)라고 한다. 기존 소득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다. 물론 민스키 모멘트를 맞는 순간 추가 소득은 아예 기대하기조차 어렵다. 빚을 낸 이는 물론 내준 이도 아찔한 상황에 처하기 쉽다. 글로벌 금융위기 땐 씨티그룹을 비롯한 미국 간판 은행과 제너럴모터스(GM) 같은 자동차 대기업도 구제금융으로 연명했다.

매킨토시는 2007년 부채에 의존해 성행한 투기가 최근에는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지만, 뒤늦게 깨닫고 나면 찾기가 훨씬 쉬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4. 금융혁신이 위기의 불씨 될 수 있다.

미국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규제당국이 아무리 자본과 신용의 과도한 공급을 막으려 노력해도 무모한 대출은 끊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매킨토시는 금융시스템이 혁신을 통해 도취감에 빠진 투자자와 기업의 자금 수요를 충족시킬 대안을 마련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위기에 앞서 인기를 모은 구조화상품이 대표적이다.

대출채권 등 다양한 비유동 자산을 증권으로 만들어 유통시키는 구조화 상품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를 심화시킨 주역으로 꼽힌다. 당시 월가는 부실한 모기지 채권을 한 데 모아 만든 모기지담보부증권(MBS)을 남발해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동시에 부동산 거품 붕괴로 시작된 부실 도미노는 금융위기를 촉발했다.

은행들이 리먼쇼크 뒤 거세진 금융규제로 몸을 사리자, 최근에는 P2P(peer-to-peer) 금융업체와 신용펀드들이 일부 자금 수요를 빨아들이고 있다. P2P 금융은 은행이나 투자회사를 거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이뤄지는 개인 간 금융 거래를 뜻한다.

5. 위기 예방엔 법보다 기억이 낫다.

매킨토시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들이 더 나은 자본과 유동성을 갖게 됐지만 위험을 전가하는 복잡한 기술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비은행권의 대출도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는 가계와 기업, 투자자들이 다음 위기를 초래할 과도한 리스크를 전처럼 떠안으려 하지 않는 건 희소식이라고 평가했다.

매킨토시가 이 대목에서 거론한 캐나다 출신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갤브레이스는 1975년에 낸 ‘대폭락 1929’ 서문에 “금융시장에 대한 환상이나 광기를 예방하는 데는 기억이 법보다 낫다”며 “1929년 재앙의 기억이 사라졌을 때, 법이나 규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고 썼다.

뉴욕증시에서 1929년 10월 24일(검은 목요일)과 29일(검은 화요일)에 일어난 대폭락 사태는 대공황의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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